[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추진한 관세 조치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본격적인 무역협상에 착수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측과의 협상에서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밀려있던 EU가 교착 상태를 깨고 미국에 손을 내민 것으로 해석된다.
 |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EU집행위원회 본사 (사진=AFP) |
|
FT가 입수한 EU 내부 브리핑 메모에 따르면, 미국과 EU는 최근 처음으로 협상 문서를 교환하고 관세, 디지털 무역, 투자 등 주요 사안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 협의에 들어갔다. 양측은 일부 분야에 대한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EU 측 협상 수장을 맡고 있는 사빈 바이얀드 EU집행위 최고무역책임자는 “미국이 원하는 빠른 성과에 흔들려선 안 된다”고 회원국 대사들에게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특히 철강·자동차 등 미국 내 생산 복귀를 유도하려는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일부 관세가 유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는 그동안 일본, 한국, 영국 등 다른 국가들보다 미국과의 협상 진전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EU 외교관들에게 “EU가 문서 형태의 협상안을 내놓지 않는 데 미국 측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며 강하게 압박했고, EU가 협상 테이블에 복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어는 “EU가 선제 조치를 내놓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지난 4월 2일 부과했던 관세를 전면 재적용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EU는 미국산 제품에 부과 중이던 20% 보복관세를 7월 8일까지 절반으로 낮추고 협상의 문을 열어둔 상태다.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철강, 알루미늄, 자동차 등에 대해 25% 추가 관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향후 의약품, 반도체, 구리, 목재, 핵심 광물, 항공 부품 등으로 관세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도 내비치고 있다. EU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U 무역담당 집행위원 마로시 셰프초비치는 최근 그리어와 통화하고, 내달 파리에서 열리는 OECD 각료회의에서 대면 협상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FT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미국과의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천연가스, 무기, 농산물 등 미국산 수입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EU의 부가가치세(VAT), 디지털 서비스 규제, 식품 안전 기준, 일부 미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 등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셰프초비치는 “미국이 요구하는 VAT 폐지나 디지털 규제 완화는 수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EU는 중국산 핵심 원자재 및 의약품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실제 EU는 중국 보조금 수혜가 의심되는 수출품에 대한 관세 조치 검토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