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콘텐츠부

전재욱

기자

그해 오늘

  • 일인 잡배 칼에 쓰러진 조선의 국모…을미사변[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황후인 명성황후가 묻혀 있다. 2005년 5월 이곳을 찾은 일본인 무리가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 조상이 1895년 10월8일 저지른 야만스러운 행위를 사죄하는 자리였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2005년 5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서 명성황후 시해범 중 한 명인 구니모토 시게 아키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오른쪽)씨가 고종의 손자 이충길씨에게 사죄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19세기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지였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섭정을 펴온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개방 압박이 더 거세졌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했다. 일본 해군의 운요호가 강화도를 무력으로 침략한 데에 조선군이 반격한 것이 계기였다.조약은 이르기까지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했으므로 과정이 불법이었고, 내용조차 조선에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힘없는 조선은 무력하게 불평등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물꼬로 미국(1882년), 영국·독일(1883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유리할 게 없는 조약이었다.각국은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서로 이권으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내분했고 열강은 갖은 빌미를 잡아 개입 명분을 마련했다. 조선군이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자 조선 왕조가 외세의 힘을 빌리려고 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파병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경복궁을 불법으로 점거했다. 내친김에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갑오개혁(1894년)을 계기로 조정에 친일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의 영향력이 세질수록 고종은 러시아와 협력했다.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 관계는 최악이었다. 영토분쟁이 발단이었다.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가 1891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인에게 피습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의 왕이 친러 성향을 보이자 일본은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고종이 1895년 훈련대를 해산하기로 일본에 통보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훈련대는 일본군이 제안해 창설한 왕실 근위대였다. 내부 구성원은 친일 인사로 꾸려졌다. 일본은 훈련대 해산 명령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협력해 갑오개혁을 방해할 때부터 일본에는 눈엣가시였다.결국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계획한다. 조선의 친러 노선 핵심인물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이로써 득세할 친일 세력을 안고서 조선을 강점하려는 계략이었다. 1895년 10월8일, 주 조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군인과 경관, 폭력배를 동원해 경복궁을 침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창설한 친일 군사 조직 훈련대가 협력했다. 그리고는 명성황후와 궁녀를 포함한 궁인을 대거 살해했다. 을미사변이다.일본은 을미사변에 정부 개입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와 알력 다툼 과정에서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로 덮어씌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걸 사실을 받아들일 이는 없었다. 이후 전국 민심이 폭발하고 의병이 일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은 야만 국가로 낙인찍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 가담자를 전부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다.2015년 한국을 찾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 (사진=한국방송)그러나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던 춘생문 사건과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터지자 돌변했다. 미국과 러시아도 조선 내정에 간섭했기에 일본도 가능하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을미사변 가담자를 석방했다. 죄가 없다는 것이다.을미사변이 터지고 110년이 흐른 2005년, 앞서에서처럼 이 사건 가담자 후손이 홍릉을 찾아서 사죄했다. 2015년 을미사변 120주기에도 마찬가지로 한국을 찾아와 사죄했다. 잘못했다는 것이다.
    전재욱 기자 2022.10.08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황후인 명성황후가 묻혀 있다. 2005년 5월 이곳을 찾은 일본인 무리가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 조상이 1895년 10월8일 저지른 야만스러운 행위를 사죄하는 자리였다.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2005년 5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서 명성황후 시해범 중 한 명인 구니모토 시게 아키의 외손자 가와노 다쓰미(오른쪽)씨가 고종의 손자 이충길씨에게 사죄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19세기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지였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섭정을 펴온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개방 압박이 더 거세졌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했다. 일본 해군의 운요호가 강화도를 무력으로 침략한 데에 조선군이 반격한 것이 계기였다.조약은 이르기까지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했으므로 과정이 불법이었고, 내용조차 조선에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힘없는 조선은 무력하게 불평등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물꼬로 미국(1882년), 영국·독일(1883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유리할 게 없는 조약이었다.각국은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서로 이권으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내분했고 열강은 갖은 빌미를 잡아 개입 명분을 마련했다. 조선군이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자 조선 왕조가 외세의 힘을 빌리려고 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파병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경복궁을 불법으로 점거했다. 내친김에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갑오개혁(1894년)을 계기로 조정에 친일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의 영향력이 세질수록 고종은 러시아와 협력했다.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 관계는 최악이었다. 영토분쟁이 발단이었다.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가 1891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인에게 피습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의 왕이 친러 성향을 보이자 일본은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고종이 1895년 훈련대를 해산하기로 일본에 통보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훈련대는 일본군이 제안해 창설한 왕실 근위대였다. 내부 구성원은 친일 인사로 꾸려졌다. 일본은 훈련대 해산 명령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협력해 갑오개혁을 방해할 때부터 일본에는 눈엣가시였다.결국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계획한다. 조선의 친러 노선 핵심인물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이로써 득세할 친일 세력을 안고서 조선을 강점하려는 계략이었다. 1895년 10월8일, 주 조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군인과 경관, 폭력배를 동원해 경복궁을 침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창설한 친일 군사 조직 훈련대가 협력했다. 그리고는 명성황후와 궁녀를 포함한 궁인을 대거 살해했다. 을미사변이다.일본은 을미사변에 정부 개입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와 알력 다툼 과정에서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로 덮어씌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걸 사실을 받아들일 이는 없었다. 이후 전국 민심이 폭발하고 의병이 일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은 야만 국가로 낙인찍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 가담자를 전부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다.2015년 한국을 찾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 (사진=한국방송)그러나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던 춘생문 사건과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터지자 돌변했다. 미국과 러시아도 조선 내정에 간섭했기에 일본도 가능하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을미사변 가담자를 석방했다. 죄가 없다는 것이다.을미사변이 터지고 110년이 흐른 2005년, 앞서에서처럼 이 사건 가담자 후손이 홍릉을 찾아서 사죄했다. 2015년 을미사변 120주기에도 마찬가지로 한국을 찾아와 사죄했다. 잘못했다는 것이다.
  • 박정희 정권 2인자 '김형욱 실종'[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79년 10월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라졌다.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그가 왜 그날, 어쩌다 거기에 갔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시에는 알려진 게 없었다. 그간 행적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볼 뿐이었다.김형욱(앞줄 오른쪽 두번째)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7년 6월22일 미국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증언하기 위해 출석한 모습.(사진=AP)1925년 황해도에서 출생한 김형욱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61년 5·16쿠데타에 가담하면서 권력 핵심으로 들어갔다. 쿠데타 공을 인정받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에 올랐다. 당시 나이 만 36세였다. 쿠데타 당시 계급이 중령에 불과했던 그는 준장까지 초고속 승진하고 1963년 예편했다. 그러면서 그해 7월 4대 중앙정보부장에 앉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해였다.김형욱 중앙정보부는 철권통치 수단이었다. 인혁당과 동백림, 통일혁명당 등 굵직한 공안 사건의 배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훗날 조작으로 드러나 무죄로 뒤바뀐 사건들이다. 정치 공작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국민복지회사건은 대표적이다. ‘김종필계 모임 국민복지회가 3선 개헌에 반대하고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을 1971년 대통령으로 당선하도록 준비한다’는 게 골자다. 중정은 이런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민주공화당은 1968년 김종필계 의원을 대거 제명했고, 김종필 의장은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났다. 사실상 경질이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의 월권과 폭압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한 것이다. 이후 권력에서 멀어진 그에게 격세지감의 장면이 펼쳐졌다. ‘김형욱은 밤마다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고 한다. 정보부장 시절 가혹행위로 재산과 지위를 빼앗긴 이들이 연일 저주를 퍼부었다.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1990년 2월27일자 동아일보 남산의부장들中)1971년 전국구 의원에 당선했지만 1972년 유신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했다. 그러면서 유신정우회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하는데, 이들이 소속한 교섭단체였다. 1973년 3월 유신정우회 의원 명단에 김형욱 이름이 빠졌다. 정권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해 4월 김형욱은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역으로 나온 박용각(곽도원 분) 포스터.(사진=남산의부장들)김형욱이 다시 공개석상에 선 것은 1977년 6월이다. 한국이 미국 정치인에게 불법 로비를 한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자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장에 나와 이 사실을 폭로하고 인권 유린까지 고발했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고록을 출간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고발하고자 한 것도 눈엣가시였다. 정권은 회유와 권유, 협박을 통해 출간을 막고자 회고록 원고를 5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러나 1974년 4월 일본에서 김형욱 회고록이 출간했다. 박정희 정권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이게 1979년 9월까지의 사정이다. 김형욱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1일 프랑스 파리에 갔고 10월7일 실종했다. 이후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시사저널’은 2005년 4월 살해에 가담한 중정 요원이라는 이를 인터뷰하고 ‘김형욱을 살해하고 시체를 분쇄해 닭 모이로 줬다’고 보도했다.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005년 5월 ‘김형욱 실종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김형욱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지시를 받은 중정 요원과 제 3국의 인물에게 살해됐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시체는 낙엽으로 덮었고, 살해에 쓰인 권총은 분실했다’고 했다.김형욱이 실종하고 19일 후에 10·26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고 김재규 중정부장은 사형을 당했다.
    전재욱 기자 2022.10.07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79년 10월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라졌다.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그가 왜 그날, 어쩌다 거기에 갔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시에는 알려진 게 없었다. 그간 행적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볼 뿐이었다.김형욱(앞줄 오른쪽 두번째)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7년 6월22일 미국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증언하기 위해 출석한 모습.(사진=AP)1925년 황해도에서 출생한 김형욱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61년 5·16쿠데타에 가담하면서 권력 핵심으로 들어갔다. 쿠데타 공을 인정받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에 올랐다. 당시 나이 만 36세였다. 쿠데타 당시 계급이 중령에 불과했던 그는 준장까지 초고속 승진하고 1963년 예편했다. 그러면서 그해 7월 4대 중앙정보부장에 앉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해였다.김형욱 중앙정보부는 철권통치 수단이었다. 인혁당과 동백림, 통일혁명당 등 굵직한 공안 사건의 배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훗날 조작으로 드러나 무죄로 뒤바뀐 사건들이다. 정치 공작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국민복지회사건은 대표적이다. ‘김종필계 모임 국민복지회가 3선 개헌에 반대하고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을 1971년 대통령으로 당선하도록 준비한다’는 게 골자다. 중정은 이런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민주공화당은 1968년 김종필계 의원을 대거 제명했고, 김종필 의장은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났다. 사실상 경질이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의 월권과 폭압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한 것이다. 이후 권력에서 멀어진 그에게 격세지감의 장면이 펼쳐졌다. ‘김형욱은 밤마다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고 한다. 정보부장 시절 가혹행위로 재산과 지위를 빼앗긴 이들이 연일 저주를 퍼부었다.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1990년 2월27일자 동아일보 남산의부장들中)1971년 전국구 의원에 당선했지만 1972년 유신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했다. 그러면서 유신정우회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하는데, 이들이 소속한 교섭단체였다. 1973년 3월 유신정우회 의원 명단에 김형욱 이름이 빠졌다. 정권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해 4월 김형욱은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역으로 나온 박용각(곽도원 분) 포스터.(사진=남산의부장들)김형욱이 다시 공개석상에 선 것은 1977년 6월이다. 한국이 미국 정치인에게 불법 로비를 한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자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장에 나와 이 사실을 폭로하고 인권 유린까지 고발했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고록을 출간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고발하고자 한 것도 눈엣가시였다. 정권은 회유와 권유, 협박을 통해 출간을 막고자 회고록 원고를 5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러나 1974년 4월 일본에서 김형욱 회고록이 출간했다. 박정희 정권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이게 1979년 9월까지의 사정이다. 김형욱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1일 프랑스 파리에 갔고 10월7일 실종했다. 이후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시사저널’은 2005년 4월 살해에 가담한 중정 요원이라는 이를 인터뷰하고 ‘김형욱을 살해하고 시체를 분쇄해 닭 모이로 줬다’고 보도했다.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005년 5월 ‘김형욱 실종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김형욱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지시를 받은 중정 요원과 제 3국의 인물에게 살해됐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시체는 낙엽으로 덮었고, 살해에 쓰인 권총은 분실했다’고 했다.김형욱이 실종하고 19일 후에 10·26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고 김재규 중정부장은 사형을 당했다.
  • YS, 임기 첫 사형집행…전국 15명 형장의 이슬로[그해 오늘]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4년 10월 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 첫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 이날 15명의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부는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기도 했으나,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오태환 등 양평 일가족 살인사건 범인들을 체포한 사실을 보도한 1990년11월13일 한겨레신문(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이들 사형수들은 강도살인이나 유괴 살인, 방화살인, 성폭행 등 대부분 강력범죄자였다. 당시 법무부는 “최근 ‘지존파’ 연쇄납치 살인사건, 온보현 사건 등 대형 강력사건이 잇따라 발생함에 따라 정부의 단호한 법집행 의지를 통해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모든 범죄자들에게 법의 엄정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법무부의 말처럼 1994년 대한민국은 강력범죄로 인한 불안감이 한껏 높았다. 특히 지존파는 무려 8명이나 되는 범인들이 살인조직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세계 범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례였다. 사형은 잇단 강력범죄에 대한 단호한 응징 차원에서 이뤄졌다.16차례에 걸쳐 부녀자를 성폭행한 박현룡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범행 수법이 끔찍했다. 그의 피해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심지어 임신 3개월 임산부를 겁탈해 유산까지 시켰고 가족들 앞에서 부녀자를 욕보이기도 했다. 당시 재판 현장을 취재했던 중앙일보 기자는 박현룡 앞에 ‘인간쓰레기’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박현룡은 검사의 사형 구형에도 “재판장님,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진실은 밝혀지겠지요”라고 혐의를 부인했다.오태환은 주범 3명 가운데 가장 나중에 세상을 떠났다. 주범 이성준은 경찰이 쏜 총에 맞고 도주하다가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윤용필은 오태환에 앞선 1992년 12월 29일 사형이 집행됐다.이들은 친척의 결혼식과 고희연에 가던 일가족 4명에게 금품을 뺏고 생매장해 사망케 하는 충격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6살에 불과한 아이도 희생돼 대한민국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장기와 사체 기증을 한 오태환이지만 여론에 떠밀려 과도한 형을 받았다며 끝까지 억울함을 피력했다.최오림은 구타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부인을 찾기 위해 처가에 침입해 등산용 도끼로 부인과 장인, 장모, 친딸을 살해했다. 전기철과 문승도는 각각 아이를 유괴해 호수에 빠뜨려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형수 15명에 대한 사형집행 소식을 전하는 1994년10월7일자 경향신문(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이들을 비롯해 서울구치소 10명, 대구교도소 3명, 부산구치소 2명 등 모두 15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됐다.문민정부는 이후에도 1995년 11월 2일 19명, 1997년 12월 30일 23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더이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한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1949년 살인범에 대한 첫 사형집행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모두 920명에 대해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현재 한국에 생존해 있는 사형수는 모두 59명이다.
    김영환 기자 2022.10.06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4년 10월 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 첫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 이날 15명의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부는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기도 했으나,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오태환 등 양평 일가족 살인사건 범인들을 체포한 사실을 보도한 1990년11월13일 한겨레신문(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이들 사형수들은 강도살인이나 유괴 살인, 방화살인, 성폭행 등 대부분 강력범죄자였다. 당시 법무부는 “최근 ‘지존파’ 연쇄납치 살인사건, 온보현 사건 등 대형 강력사건이 잇따라 발생함에 따라 정부의 단호한 법집행 의지를 통해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모든 범죄자들에게 법의 엄정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법무부의 말처럼 1994년 대한민국은 강력범죄로 인한 불안감이 한껏 높았다. 특히 지존파는 무려 8명이나 되는 범인들이 살인조직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세계 범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례였다. 사형은 잇단 강력범죄에 대한 단호한 응징 차원에서 이뤄졌다.16차례에 걸쳐 부녀자를 성폭행한 박현룡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범행 수법이 끔찍했다. 그의 피해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심지어 임신 3개월 임산부를 겁탈해 유산까지 시켰고 가족들 앞에서 부녀자를 욕보이기도 했다. 당시 재판 현장을 취재했던 중앙일보 기자는 박현룡 앞에 ‘인간쓰레기’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박현룡은 검사의 사형 구형에도 “재판장님,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진실은 밝혀지겠지요”라고 혐의를 부인했다.오태환은 주범 3명 가운데 가장 나중에 세상을 떠났다. 주범 이성준은 경찰이 쏜 총에 맞고 도주하다가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윤용필은 오태환에 앞선 1992년 12월 29일 사형이 집행됐다.이들은 친척의 결혼식과 고희연에 가던 일가족 4명에게 금품을 뺏고 생매장해 사망케 하는 충격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6살에 불과한 아이도 희생돼 대한민국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장기와 사체 기증을 한 오태환이지만 여론에 떠밀려 과도한 형을 받았다며 끝까지 억울함을 피력했다.최오림은 구타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부인을 찾기 위해 처가에 침입해 등산용 도끼로 부인과 장인, 장모, 친딸을 살해했다. 전기철과 문승도는 각각 아이를 유괴해 호수에 빠뜨려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형수 15명에 대한 사형집행 소식을 전하는 1994년10월7일자 경향신문(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이들을 비롯해 서울구치소 10명, 대구교도소 3명, 부산구치소 2명 등 모두 15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됐다.문민정부는 이후에도 1995년 11월 2일 19명, 1997년 12월 30일 23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더이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한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1949년 살인범에 대한 첫 사형집행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모두 920명에 대해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현재 한국에 생존해 있는 사형수는 모두 59명이다.
  • '선의·동정'을 범행 표적 삼은 살인마 '이영학'[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10월 5일. 서울 도봉구 한 빌라에 들이닥친 경찰이 당시 30대 남성과 그의 중학교 2학년 딸을 긴급체포했다. 이들의 혐의는 딸의 친구인 A양의 실종 관련이었다. 경찰서로 압송된 남성은 A양의 행방에 대한 경찰의 질문에 “살해 후 강원도 영월의 한 야산에 유기했다”고 답했다. 경찰은 유기 장소 인근을 수색했고 다음 날인 6일 오전 A양 시신을 발견했다.수사에 나선 경찰은 끔찍한 범행 수법에 놀랐다. 그리고 같은 달 12일 신상정보공개 심의위원회를 열고 범인의 신원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범인은 ‘어금니 아빠’로 여러 차례 언론에 등장했던 이영학(1982년생)이었다. ‘부성애’로 포장됐던 살인마 이영학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 지상파 방송에 나왔던 이영학의 모습. 그는 미디어에서 희귀질환에 걸린 아픈 딸을 챙기는 아빠로 포장돼 후원금 수억원을 모을 수 있었다.이영학은 어린 시절부터 희귀 질환인 거대백악종을 앓았다. 2003년 태어난 딸 이모씨도 2005년 이영학과 같은 질환 진단을 받았다. 딸의 희귀병 진단을 계기로 이영학은 사람들의 동정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미디어가 철저히 이용됐다.◇미디어 통해 ‘어금니 아빠’로 유명세→10억 탕진이영학은 2005년 초부터 서울 도심 곳곳에서 ‘저 때문에 제 딸이 아프다’는 피켓을 들고 행인들에게 금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연은 같은해 3월 한 지상파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다. 같은해 11월 또 다른 지상파 방송사에서 이영학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으로 소개했다. 이영학은 이때부터 ‘희귀병에 걸린 아픈 딸을 챙기는 아빠’라는 이미지로서 ‘어금니 아빠’로 유명세를 얻게 됐다. 한 사회복지법인이 2005년 12월 딸의 수술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나, 수천만원의 후원금을 챙긴 이영학은 후원금 모집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듬해 11월 딸의 이름을 딴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후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딸의 질병은 전 세계에서 나와 딸 2명뿐이다. 수술비가 최대 10억원인데 돈이 없다. 딸을 살려달라”는 글을 올렸다.그리고 한 달 후인 2006년 12월 지상파 방송국들이 잇따라 이영학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영학은 당시 다른 전과를 제외하고 사기 전과만 3범이었지만 언론들은 앞다퉈 이영학의 사연을 소개했고, 후원액은 나날이 커졌다. 연말에는 이영학이 후원금 모집을 위해 국토 대장정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국토 대장정은 가짜였지만 방송에선 실제로 한 듯이 나왔다. 이영학이 아내 B씨 사망 후 올린 추모 영상. 이영학은 정작 아내에게 성매매를 시키는 등 학대를 일삼았다.이영학은 2007년 1월, 2009년 3월, 2017년 2월에도 ‘안타까운 사연’이라며 방송에 소개됐다. 이영학은 이와 별도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29회에 걸쳐 신문에 ‘아이를 살려달라’는 내용의 후원요청 광고를 했다. 2007년 10월엔 ‘어금니 아빠의 행복’이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이영학이 이런 방식으로 10년 넘게 모집한 후원·기부금은 9억 4500만원이 넘었다. 엄청난 후원금을 받아 챙기면서도 이영학은 10년 넘는 기간 동안 국가로부터 복지수당 1억 25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 챙겼다. 이영학이 후원금을 생활비, 유흥비, 성형수술비 등으로 주로 사용했다. 고급 외제차 등 차량만 30여차례 바꾸는 등 흥청망청 사용하며 모두 탕진했다. 딸의 치료비에 쓰인 돈은 고작 700만원에 불과했다.◇아내도 그저 ‘도구’로 삼아…계부 상대 강간 무고 범행 동참 A양에 대한 범행도 철저히 ‘선의와 동정’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영학은 2017년 9월 초 자신의 아내 B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당시 만 14세에 불과했던 딸에게 “엄마 대신 나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친구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딸의 휴대전화에서 피해자 A양을 꼭 집어 집으로 데리고 오도록 했다.정상인의 범주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영학의 행동은 자신의 아내에게 했던 행동의 연장선이었다. 이영학은 B씨가 만 17세에 불과하던 2002년부터 동거를 했다. B씨와의 사이에서 딸까지 낳았지만 이영학에게 B씨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후원금을 수시로 탕진했던 이영학은 B씨에게 성매매를 시켜 자신의 생활비로 사용했다.아울러 자신의 계부 C씨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으로 B씨에게 수차례 성관계를 한 후 수차례 고소하도록 했다. 처벌이 되지 않자 또다시 2017년 9월초 계략을 꾸민 후 경찰에 C씨를 고소했다. 이 같은 범행에 동조했음에도 이영학으로부터 멸시를 받자 B씨는 결국 2017년 9월 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는 이영학 모습. (사진=연합뉴스)이영학은 B씨와 같이 자신의 도구가 될 누군가를 만들기 위해 범행을 계획한 것이다. A양은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멤버가 나오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요청을 이영학 딸로부터 받고 이를 수락했다. 평소 부모로부터 “어려운 친구에게 잘 대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A양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이영학 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영학은 A양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를 먹여 음란행위를 하다 깨어난 A양이 반항하자 잔혹하게 살해했다. A양 가족은 “평소 어려운 친구에게 잘 대해 주라고 한 말을 사무치도록 후회한다”고 원통함을 드러냈다.◇1심 “사형수로서 참회해야”→2심 “교화 가능성 없다 단정 어렵다” 무기친구를 유인했던 이영학은 범행에 철저히 가담했다. 이영학이 성범죄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을 예상하고도 A양을 유인했고, A양 가족들에게 A양의 행방을 숨긴 것은 물론 A양 휴대전화를 직접 버리기도 했다. A양이 숨진 후에는 이영학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체유기에 나서기도 했다. A양의 행방을 묻는 친구들에게 “괜찮아 살아는 있겠지…ㅋㅋㅋ”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이영학과 딸은 사체유기 후 도주했다. 도주 중에도 이영학은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범행 후 녹화된 차량 블랙박스에는 콧노래를 부르거나 웃으면서 운전을 하는 모습이 찍혔고, 차량 안에서 아내 B씨 죽음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의 동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영학과 딸은 서울의 한 모텔에 숨어있다 10월 5일 체포됐다.이영학은 체포 후에도 반성 따윈 없었다. “일평생 피눈물을 흘리면서 학생(피해자)을 위해 울고 기도하겠다” 등의 가식적인 모습을 반복하며 자신의 딸 안위에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옥중에서 가족 등에게 보낸 편지에선 ‘복수’나 ‘출소 후 계획’을 언급하기도 했다. 법정에선 “석방되면 (후원 사기 범행에 대해 진술한) 친형을 죽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1심 법원은 “이영학을 준엄한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영원히 우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극형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비록 사형이 집행되지 않더라도 사형수로서 평생 참회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피해자 및 피해자의 유족에 대한 이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공감과 위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다.2심은 “반성문이나 법정 진술을 위선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이영학을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이지만 교화가능성 등을 부정해 사형에 처할 정도라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판단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018년 11월 형을 확정했다. 이영학 딸은 범행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이영학에게 정신적으로 지배됐던 점이 인정돼 징역 장기 6년, 단기 4년형에 그쳤다.
    한광범 기자 2022.10.05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10월 5일. 서울 도봉구 한 빌라에 들이닥친 경찰이 당시 30대 남성과 그의 중학교 2학년 딸을 긴급체포했다. 이들의 혐의는 딸의 친구인 A양의 실종 관련이었다. 경찰서로 압송된 남성은 A양의 행방에 대한 경찰의 질문에 “살해 후 강원도 영월의 한 야산에 유기했다”고 답했다. 경찰은 유기 장소 인근을 수색했고 다음 날인 6일 오전 A양 시신을 발견했다.수사에 나선 경찰은 끔찍한 범행 수법에 놀랐다. 그리고 같은 달 12일 신상정보공개 심의위원회를 열고 범인의 신원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범인은 ‘어금니 아빠’로 여러 차례 언론에 등장했던 이영학(1982년생)이었다. ‘부성애’로 포장됐던 살인마 이영학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 지상파 방송에 나왔던 이영학의 모습. 그는 미디어에서 희귀질환에 걸린 아픈 딸을 챙기는 아빠로 포장돼 후원금 수억원을 모을 수 있었다.이영학은 어린 시절부터 희귀 질환인 거대백악종을 앓았다. 2003년 태어난 딸 이모씨도 2005년 이영학과 같은 질환 진단을 받았다. 딸의 희귀병 진단을 계기로 이영학은 사람들의 동정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미디어가 철저히 이용됐다.◇미디어 통해 ‘어금니 아빠’로 유명세→10억 탕진이영학은 2005년 초부터 서울 도심 곳곳에서 ‘저 때문에 제 딸이 아프다’는 피켓을 들고 행인들에게 금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연은 같은해 3월 한 지상파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다. 같은해 11월 또 다른 지상파 방송사에서 이영학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으로 소개했다. 이영학은 이때부터 ‘희귀병에 걸린 아픈 딸을 챙기는 아빠’라는 이미지로서 ‘어금니 아빠’로 유명세를 얻게 됐다. 한 사회복지법인이 2005년 12월 딸의 수술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나, 수천만원의 후원금을 챙긴 이영학은 후원금 모집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듬해 11월 딸의 이름을 딴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후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딸의 질병은 전 세계에서 나와 딸 2명뿐이다. 수술비가 최대 10억원인데 돈이 없다. 딸을 살려달라”는 글을 올렸다.그리고 한 달 후인 2006년 12월 지상파 방송국들이 잇따라 이영학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영학은 당시 다른 전과를 제외하고 사기 전과만 3범이었지만 언론들은 앞다퉈 이영학의 사연을 소개했고, 후원액은 나날이 커졌다. 연말에는 이영학이 후원금 모집을 위해 국토 대장정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국토 대장정은 가짜였지만 방송에선 실제로 한 듯이 나왔다. 이영학이 아내 B씨 사망 후 올린 추모 영상. 이영학은 정작 아내에게 성매매를 시키는 등 학대를 일삼았다.이영학은 2007년 1월, 2009년 3월, 2017년 2월에도 ‘안타까운 사연’이라며 방송에 소개됐다. 이영학은 이와 별도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29회에 걸쳐 신문에 ‘아이를 살려달라’는 내용의 후원요청 광고를 했다. 2007년 10월엔 ‘어금니 아빠의 행복’이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이영학이 이런 방식으로 10년 넘게 모집한 후원·기부금은 9억 4500만원이 넘었다. 엄청난 후원금을 받아 챙기면서도 이영학은 10년 넘는 기간 동안 국가로부터 복지수당 1억 25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 챙겼다. 이영학이 후원금을 생활비, 유흥비, 성형수술비 등으로 주로 사용했다. 고급 외제차 등 차량만 30여차례 바꾸는 등 흥청망청 사용하며 모두 탕진했다. 딸의 치료비에 쓰인 돈은 고작 700만원에 불과했다.◇아내도 그저 ‘도구’로 삼아…계부 상대 강간 무고 범행 동참 A양에 대한 범행도 철저히 ‘선의와 동정’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영학은 2017년 9월 초 자신의 아내 B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당시 만 14세에 불과했던 딸에게 “엄마 대신 나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친구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딸의 휴대전화에서 피해자 A양을 꼭 집어 집으로 데리고 오도록 했다.정상인의 범주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영학의 행동은 자신의 아내에게 했던 행동의 연장선이었다. 이영학은 B씨가 만 17세에 불과하던 2002년부터 동거를 했다. B씨와의 사이에서 딸까지 낳았지만 이영학에게 B씨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후원금을 수시로 탕진했던 이영학은 B씨에게 성매매를 시켜 자신의 생활비로 사용했다.아울러 자신의 계부 C씨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으로 B씨에게 수차례 성관계를 한 후 수차례 고소하도록 했다. 처벌이 되지 않자 또다시 2017년 9월초 계략을 꾸민 후 경찰에 C씨를 고소했다. 이 같은 범행에 동조했음에도 이영학으로부터 멸시를 받자 B씨는 결국 2017년 9월 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는 이영학 모습. (사진=연합뉴스)이영학은 B씨와 같이 자신의 도구가 될 누군가를 만들기 위해 범행을 계획한 것이다. A양은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멤버가 나오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요청을 이영학 딸로부터 받고 이를 수락했다. 평소 부모로부터 “어려운 친구에게 잘 대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A양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이영학 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영학은 A양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를 먹여 음란행위를 하다 깨어난 A양이 반항하자 잔혹하게 살해했다. A양 가족은 “평소 어려운 친구에게 잘 대해 주라고 한 말을 사무치도록 후회한다”고 원통함을 드러냈다.◇1심 “사형수로서 참회해야”→2심 “교화 가능성 없다 단정 어렵다” 무기친구를 유인했던 이영학은 범행에 철저히 가담했다. 이영학이 성범죄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을 예상하고도 A양을 유인했고, A양 가족들에게 A양의 행방을 숨긴 것은 물론 A양 휴대전화를 직접 버리기도 했다. A양이 숨진 후에는 이영학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체유기에 나서기도 했다. A양의 행방을 묻는 친구들에게 “괜찮아 살아는 있겠지…ㅋㅋㅋ”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이영학과 딸은 사체유기 후 도주했다. 도주 중에도 이영학은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범행 후 녹화된 차량 블랙박스에는 콧노래를 부르거나 웃으면서 운전을 하는 모습이 찍혔고, 차량 안에서 아내 B씨 죽음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의 동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영학과 딸은 서울의 한 모텔에 숨어있다 10월 5일 체포됐다.이영학은 체포 후에도 반성 따윈 없었다. “일평생 피눈물을 흘리면서 학생(피해자)을 위해 울고 기도하겠다” 등의 가식적인 모습을 반복하며 자신의 딸 안위에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옥중에서 가족 등에게 보낸 편지에선 ‘복수’나 ‘출소 후 계획’을 언급하기도 했다. 법정에선 “석방되면 (후원 사기 범행에 대해 진술한) 친형을 죽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1심 법원은 “이영학을 준엄한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영원히 우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극형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비록 사형이 집행되지 않더라도 사형수로서 평생 참회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피해자 및 피해자의 유족에 대한 이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공감과 위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다.2심은 “반성문이나 법정 진술을 위선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이영학을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이지만 교화가능성 등을 부정해 사형에 처할 정도라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판단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018년 11월 형을 확정했다. 이영학 딸은 범행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이영학에게 정신적으로 지배됐던 점이 인정돼 징역 장기 6년, 단기 4년형에 그쳤다.
  • 경찰이 조작한 살인범…진범이 무죄를 증언하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9년 10월 4일.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임이 드러난 이춘재가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8차 사건 역시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춘재는 경찰과의 면담에서 “8차 사건도 모방범죄가 아니라, 내가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중 유일하게 범인이 잡혔던 사건마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함에 따라 자백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애초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사건 10건 중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과 함께 추가로 5건의 범행과 강간과 강간미수 30여건에 대해서도 범행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언론은 당시 경찰 발표를 토대로 일제히 ‘진범이 잡힌 8차 사건 제외한’ 범행에 대해 자백을 했다고 보도했으나 경찰은 이를 바로 잡지 않았다.경찰의 고문에 따른 허위자백으로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가 2020년 12월 17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한 주택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당한 후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경찰은 이듬해 7월 26일 8차 사건의 범인을 검거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경찰이 발표한 범인은 인근의 농기계 수리공인 윤성여(당시 22세)씨였다. ◇“당시 허위자백 안했으면 지금 세상에 없었다”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어렵게 살았던 윤씨는 1989년 7월 25일 집에서 저녁을 먹다,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끌려갔다. 형식은 임의동행이었지만 사실상 불법체포에 가까웠다. DNA 검사 기술이 없던 시절, 당시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 내 금속 성분이 윤씨 것과 유사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가 유일한 단서였다. 현재 기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감정이었다.경찰들은 윤씨는 경찰서가 아닌 인근의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이미 캄캄해진 시간이라 야산엔 인적조차 없었다. 덩치가 큰 경찰관 여러 명은 윤씨에게 협박조로 “순순히 자백하라”고 요구했다. 윤씨가 혐의를 부인하자 그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는 계속된 추궁에도 혐의를 강력 부인했지만, 부인 대가로 날아온 건 경찰의 모진 구타와 가혹행위였다. 결국 그는 이를 이기지 못하고 다음날인 26일 새벽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 이 자백으로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윤씨는 수감 중이던 2003년 한 언론과의 옥중 인터뷰에서도 ‘당시 자백을 왜 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때 자백을 안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라며 경찰의 잔혹했던 고문을 언급했다.◇경찰들 “검찰·법원서도 허위자백 유지해라” 압박경찰은 가혹행위로 받아낸 허위 자백을 토대로 윤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해 법원으로부터 28일 영장을 발부받았다. 경찰은 하루 뒤 현장검증을 실시한 후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윤씨는 경찰에 있는 3일 동안 모진 고문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검찰은 경찰 수사 그대로 윤씨를 살인과 강간치사죄로 재판에 넘겼다. 윤씨에게 가혹행위를 했던 경찰관 5명은 ‘범인 검거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12월 특별승진을 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 이춘재는 2020년 11월 2일 윤성여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8차 사건의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사진=연합뉴스)재판에 넘겨진 윤씨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1심에서도 범행을 모두 인정했다. 여기엔 “검찰 조사와 재판 중에도 경찰 진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경찰관들의 협박이 작용했다. 1심 재판부는 1989년 10월 윤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심 판결 후 윤씨는 경찰의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털어놨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허위 진술을 했고, 검찰 조사와 법정에서도 진술을 유지하도록 강요당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고,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무기징역형을 유지했다. 대법원 역시 1990년 5월 “자백의 신빙성이 넉넉히 인정된다”며 형을 확정했다.◇고문 경찰관, 사과도 불이익도 없다무기수가 된 윤씨는 지속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옥중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속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상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윤씨는 수감 중에도 재심을 신청하려 했으나 진범이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재심 신청이 받아들이지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포기했다. 윤씨는 모범수로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2009년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살인 전과자’라는 사회적 냉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렇게 10년을 사회에서 보낸 후 이춘재의 자백이 나온 후에야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법원은 2020년 12월 윤씨 재심 사건에서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화성 연쇄살인사건 당시 경찰의 가혹수사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봤다. 임의동행으로 불려가 경찰로부터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한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시민들 일부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윤씨는 당시 고문에 대해 “경찰관들이 ‘네가 죽어도 상관없다’며 고문을 했다”고 설명했다.경찰청이 윤씨에게 공식 사과했지만, 윤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던 당시 수사 경찰관들은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직폭행 등에 대한 공소시효 만료로 형사처벌을 피했고, 소멸시효 만료로 민사책임도 지지 않았다. 경찰청은 2021년 윤씨를 수사했던 경찰관 5명에 대한 1989년 특진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퇴직한 이들 5명의 퇴직계급은 그대로 인정돼 이들에겐 실제 불이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광범 기자 2022.10.04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9년 10월 4일.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임이 드러난 이춘재가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8차 사건 역시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춘재는 경찰과의 면담에서 “8차 사건도 모방범죄가 아니라, 내가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중 유일하게 범인이 잡혔던 사건마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함에 따라 자백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애초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사건 10건 중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과 함께 추가로 5건의 범행과 강간과 강간미수 30여건에 대해서도 범행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언론은 당시 경찰 발표를 토대로 일제히 ‘진범이 잡힌 8차 사건 제외한’ 범행에 대해 자백을 했다고 보도했으나 경찰은 이를 바로 잡지 않았다.경찰의 고문에 따른 허위자백으로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가 2020년 12월 17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한 주택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당한 후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경찰은 이듬해 7월 26일 8차 사건의 범인을 검거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경찰이 발표한 범인은 인근의 농기계 수리공인 윤성여(당시 22세)씨였다. ◇“당시 허위자백 안했으면 지금 세상에 없었다”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어렵게 살았던 윤씨는 1989년 7월 25일 집에서 저녁을 먹다,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끌려갔다. 형식은 임의동행이었지만 사실상 불법체포에 가까웠다. DNA 검사 기술이 없던 시절, 당시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 내 금속 성분이 윤씨 것과 유사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가 유일한 단서였다. 현재 기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감정이었다.경찰들은 윤씨는 경찰서가 아닌 인근의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이미 캄캄해진 시간이라 야산엔 인적조차 없었다. 덩치가 큰 경찰관 여러 명은 윤씨에게 협박조로 “순순히 자백하라”고 요구했다. 윤씨가 혐의를 부인하자 그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는 계속된 추궁에도 혐의를 강력 부인했지만, 부인 대가로 날아온 건 경찰의 모진 구타와 가혹행위였다. 결국 그는 이를 이기지 못하고 다음날인 26일 새벽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 이 자백으로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윤씨는 수감 중이던 2003년 한 언론과의 옥중 인터뷰에서도 ‘당시 자백을 왜 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때 자백을 안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라며 경찰의 잔혹했던 고문을 언급했다.◇경찰들 “검찰·법원서도 허위자백 유지해라” 압박경찰은 가혹행위로 받아낸 허위 자백을 토대로 윤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해 법원으로부터 28일 영장을 발부받았다. 경찰은 하루 뒤 현장검증을 실시한 후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윤씨는 경찰에 있는 3일 동안 모진 고문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검찰은 경찰 수사 그대로 윤씨를 살인과 강간치사죄로 재판에 넘겼다. 윤씨에게 가혹행위를 했던 경찰관 5명은 ‘범인 검거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12월 특별승진을 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 이춘재는 2020년 11월 2일 윤성여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8차 사건의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사진=연합뉴스)재판에 넘겨진 윤씨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1심에서도 범행을 모두 인정했다. 여기엔 “검찰 조사와 재판 중에도 경찰 진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경찰관들의 협박이 작용했다. 1심 재판부는 1989년 10월 윤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심 판결 후 윤씨는 경찰의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털어놨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허위 진술을 했고, 검찰 조사와 법정에서도 진술을 유지하도록 강요당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고,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무기징역형을 유지했다. 대법원 역시 1990년 5월 “자백의 신빙성이 넉넉히 인정된다”며 형을 확정했다.◇고문 경찰관, 사과도 불이익도 없다무기수가 된 윤씨는 지속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옥중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속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상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윤씨는 수감 중에도 재심을 신청하려 했으나 진범이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재심 신청이 받아들이지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포기했다. 윤씨는 모범수로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2009년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살인 전과자’라는 사회적 냉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렇게 10년을 사회에서 보낸 후 이춘재의 자백이 나온 후에야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법원은 2020년 12월 윤씨 재심 사건에서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화성 연쇄살인사건 당시 경찰의 가혹수사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봤다. 임의동행으로 불려가 경찰로부터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한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시민들 일부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윤씨는 당시 고문에 대해 “경찰관들이 ‘네가 죽어도 상관없다’며 고문을 했다”고 설명했다.경찰청이 윤씨에게 공식 사과했지만, 윤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던 당시 수사 경찰관들은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직폭행 등에 대한 공소시효 만료로 형사처벌을 피했고, 소멸시효 만료로 민사책임도 지지 않았다. 경찰청은 2021년 윤씨를 수사했던 경찰관 5명에 대한 1989년 특진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퇴직한 이들 5명의 퇴직계급은 그대로 인정돼 이들에겐 실제 불이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 6세 입양아를 화풀이 대상 삼은 세 살인마[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6년 10월 3일. 경기도 포천의 한 야산에서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경찰들 인근엔 한 40대 남성 주모(1969년생)씨가 수갑이 채워진 채 불에 탄 흔적이 있는 현장을 지목하고 있었다.경찰들이 찾는 건 불과 이틀 전 실종신고가 됐던 6세 A양의 시신이나 유골이었다. 장시간의 수색에도 쉽사리 발견되지 않던 찰나에 아주 작은 뼛조각이 발견됐다. 감식 결과 발견된 뼛조각은 A양의 머리뼈와 다리뼈였다.A양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유골조차 제대로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걸까.살해된 포천 6세 입양아의 양부 주모씨가 2016년 10월 7일 현장 검증을 위해 자신이 거주하던 한 아파트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부모님의 이혼으로 A양은 태어난 직후부터 2013년까지 친모와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친모는 2013년 3월 포천에 거주하던 지인 김모(여, 1986년생)와 주씨 부부에게 아이를 맡겼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김씨의 뜻에 따라 A양은 김씨 부부의 가족이 됐다.수입이 변변치 못했던 김씨 부부는 과소비까지 더해지며 2015년 말부터 경제적 상황이 악화했다. 그러던 중 2016년 3월엔 지낼 곳이 없던 주씨 지인의 딸 임모(여, 1997년생)씨가 생활비를 내는 조건으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양모가 학대 주도…방조했던 양부도 합세 경제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 더해 집안은 더욱 북적북적거리자 김씨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이를 A양에게 풀기 시작했다. 다니던 어린이집까지 보내지 않으며 집안에서 A양에게 나날이 심한 학대를 가했다. 고문에 가까운 학대는 2016년 6월부터 3개월 넘게 계속됐다. 학대 초반 방관자였던 주씨와 임씨도 점점 더 학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아이의 안부를 묻는 친모에겐 “잘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반복했다.추석 연휴 기간에 50시간 넘게 묶여놓는 등 학대의 강도는 나날이 강해졌고, 결국 A양은 9월 29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김씨 등은 죽어가는 A양을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방치해 숨지게 했다. 사망 전 마지막으로 측정된 A양의 키는 92㎝, 체중은 15㎏에 불과했다. A양 사망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진 김씨 등은 9월 30일 늦은 밤 시신을 포천의 한 야산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A양의 시신을 나뭇가지 등을 이용해 태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골이 발견되지 못하도록 잘게 부순 후 암매장했다. 장기간의 소각으로 유골에선 유전자 감정 결과조차 나오지 않았다.지인의 아이를 입양한 후 잔혹하게 학대를 주도해 숨지게 한 양모 김모씨. (사진=뉴스1)김씨 등은 이후 완전범죄를 꿈꿨다. 사체를 태운 후 자신들이 범행 당시 입었던 옷을 모두 태우는 것은 물론 차량 블랙박스와 휴대전화 데이터도 모두 초기화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2016년 10월 1일 이른 아침 이들은 차를 끌고 인천 소래포구로 이동했다. 당시 소래포구에선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참여인원만 10만명에 달하는 축제였다.◇잔혹한 사체손괴에 “유전자 감정 불가”이들은 소래포구 어시장 인근을 돌아다니다 오후 3시 40분 112에 전화를 했다. “축제에 왔다가 정오쯤 딸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A양 친모에게도 전화를 걸어 “아이를 잃어버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고 전했다. 김씨의 말을 믿은 친모는 인터넷 사이트에 ‘실종된 아이를 찾는다’는 글과 함께 아이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하지만 김씨 등의 거짓말은 바로 경찰에 들통 났다. 늦은 실종신고를 의심한 경찰이 이들의 포천 집 인근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소래포구 출발 당시부터 A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한 것이다.경찰은 10월 2일 김씨 부부와 임씨를 긴급체포해 강도 높은 수사에 나섰고 “학대로 A양이 죽었고 처벌이 두려워 사체를 훼손했다”고 진술을 받아냈다. 이들은 애초 살인 혐의를 부인했으나 법정에서 혐의를 인정했다.1심은 “가족이라고 믿었던 이들로부터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당하며 피해자는 어려운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상응하는 엄한 처벌을 해야 한다”며 양모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남편 주씨는 징역 25년, 공범 임씨는 징역 15년 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우리 사회는 이 같은 참혹한 결과가 발생할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관심했다. 그리고 아동학대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 등을 충분히 마련·시행하지 못했다”며 “엄한 처벌만이 피해자에 대한 죄송함의 고백이자 최소한의 예의”라고 밝혔다.김씨 등은 ‘형량이 과도하다’며 불복했지만 상급심에서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한광범 기자 2022.10.03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6년 10월 3일. 경기도 포천의 한 야산에서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경찰들 인근엔 한 40대 남성 주모(1969년생)씨가 수갑이 채워진 채 불에 탄 흔적이 있는 현장을 지목하고 있었다.경찰들이 찾는 건 불과 이틀 전 실종신고가 됐던 6세 A양의 시신이나 유골이었다. 장시간의 수색에도 쉽사리 발견되지 않던 찰나에 아주 작은 뼛조각이 발견됐다. 감식 결과 발견된 뼛조각은 A양의 머리뼈와 다리뼈였다.A양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유골조차 제대로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걸까.살해된 포천 6세 입양아의 양부 주모씨가 2016년 10월 7일 현장 검증을 위해 자신이 거주하던 한 아파트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부모님의 이혼으로 A양은 태어난 직후부터 2013년까지 친모와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친모는 2013년 3월 포천에 거주하던 지인 김모(여, 1986년생)와 주씨 부부에게 아이를 맡겼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김씨의 뜻에 따라 A양은 김씨 부부의 가족이 됐다.수입이 변변치 못했던 김씨 부부는 과소비까지 더해지며 2015년 말부터 경제적 상황이 악화했다. 그러던 중 2016년 3월엔 지낼 곳이 없던 주씨 지인의 딸 임모(여, 1997년생)씨가 생활비를 내는 조건으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양모가 학대 주도…방조했던 양부도 합세 경제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 더해 집안은 더욱 북적북적거리자 김씨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이를 A양에게 풀기 시작했다. 다니던 어린이집까지 보내지 않으며 집안에서 A양에게 나날이 심한 학대를 가했다. 고문에 가까운 학대는 2016년 6월부터 3개월 넘게 계속됐다. 학대 초반 방관자였던 주씨와 임씨도 점점 더 학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아이의 안부를 묻는 친모에겐 “잘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반복했다.추석 연휴 기간에 50시간 넘게 묶여놓는 등 학대의 강도는 나날이 강해졌고, 결국 A양은 9월 29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김씨 등은 죽어가는 A양을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방치해 숨지게 했다. 사망 전 마지막으로 측정된 A양의 키는 92㎝, 체중은 15㎏에 불과했다. A양 사망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진 김씨 등은 9월 30일 늦은 밤 시신을 포천의 한 야산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A양의 시신을 나뭇가지 등을 이용해 태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골이 발견되지 못하도록 잘게 부순 후 암매장했다. 장기간의 소각으로 유골에선 유전자 감정 결과조차 나오지 않았다.지인의 아이를 입양한 후 잔혹하게 학대를 주도해 숨지게 한 양모 김모씨. (사진=뉴스1)김씨 등은 이후 완전범죄를 꿈꿨다. 사체를 태운 후 자신들이 범행 당시 입었던 옷을 모두 태우는 것은 물론 차량 블랙박스와 휴대전화 데이터도 모두 초기화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2016년 10월 1일 이른 아침 이들은 차를 끌고 인천 소래포구로 이동했다. 당시 소래포구에선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참여인원만 10만명에 달하는 축제였다.◇잔혹한 사체손괴에 “유전자 감정 불가”이들은 소래포구 어시장 인근을 돌아다니다 오후 3시 40분 112에 전화를 했다. “축제에 왔다가 정오쯤 딸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A양 친모에게도 전화를 걸어 “아이를 잃어버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고 전했다. 김씨의 말을 믿은 친모는 인터넷 사이트에 ‘실종된 아이를 찾는다’는 글과 함께 아이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하지만 김씨 등의 거짓말은 바로 경찰에 들통 났다. 늦은 실종신고를 의심한 경찰이 이들의 포천 집 인근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소래포구 출발 당시부터 A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한 것이다.경찰은 10월 2일 김씨 부부와 임씨를 긴급체포해 강도 높은 수사에 나섰고 “학대로 A양이 죽었고 처벌이 두려워 사체를 훼손했다”고 진술을 받아냈다. 이들은 애초 살인 혐의를 부인했으나 법정에서 혐의를 인정했다.1심은 “가족이라고 믿었던 이들로부터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당하며 피해자는 어려운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상응하는 엄한 처벌을 해야 한다”며 양모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남편 주씨는 징역 25년, 공범 임씨는 징역 15년 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우리 사회는 이 같은 참혹한 결과가 발생할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관심했다. 그리고 아동학대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 등을 충분히 마련·시행하지 못했다”며 “엄한 처벌만이 피해자에 대한 죄송함의 고백이자 최소한의 예의”라고 밝혔다.김씨 등은 ‘형량이 과도하다’며 불복했지만 상급심에서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서울올림픽 폐막[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88년 10월2일 서울올림픽이 폐막했다. 16일간 벌어진 열전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이 순위는 지금까지 한국이 올림픽에서 거둔 순위 가운데 최고로서 깨지지 않고 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사진=IOC)한국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스포츠 강국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았다. 냉전 시대 희생양에서 냉전 시대를 종식한 주역이라는 평가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전까지 올림픽은 이념의 진영논리가 참가를 좌우했다.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미국 로스앤젤러스 올림픽(1984년)은 소련을 포함한 공산 진영이 각각 보이콧한 반쪽짜리로 치렀다.서울올림픽은 미소를 비롯한 동서구권이 고르게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밴드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서울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진 단면을 보여준다. 서로 손에 손잡고 반목을 멈추고 화합해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이루자는 희망을 전 세계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는 집요했다. 1987년 터진 KAL(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대표적이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탑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국적기를 폭파한 사건이었다. 사건으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대선을 앞두고 거센 북풍이 불었는데, 자연스레 서울올림픽에 대한 테러 우려도 커졌다. 북한은 선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부추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불참한 IOC 회원국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7개국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권을 상징하는 소련과 동독마저도 선수단을 서울올림픽행 비행기에 태웠다.서울올림픽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던 이유는 체제의 열위 탓이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으로 전락했는데, 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남북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제 노선으로 택하고 경쟁했다. 한때 북한이 남한을 원조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세계적으로 드러났다.마스코트 호돌이도 큰 사랑을 받았다. 디자이너 김현씨가 그려서 국민 공모를 거쳐 탄생했다. 한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에 무엇을 한국의 상징으로 입힐지가 관건이었다. 상모가 안성맞춤이었다. 호돌이가 쓴 상모에 달린 물채는 알파벳 ‘S’ 자를 하고 있는데, 올림픽의 역동성과 서울(Seoul)을 나타낸다. 미국 식품사 켈로그사가 자기들 캐릭터 ‘토니 주니어’를 베꼈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올림픽을 계기로 내수 경기는 불같이 일어났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과 올림픽을 즐기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요식업, 관광업, 숙박업 등이 활기를 띠었다. 서울지하철이 4호선까지 깔리면서 활동반경도 확장했다.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으로 소비력이 커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진출한 외국 브랜드가 한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도 됐다.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서울올림픽까지 경기장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시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잣집은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부랑자와 노숙인 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국가폭력 사건으로 규정된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가 커진 데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자유롭지 못하다.
    전재욱 기자 2022.10.02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88년 10월2일 서울올림픽이 폐막했다. 16일간 벌어진 열전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이 순위는 지금까지 한국이 올림픽에서 거둔 순위 가운데 최고로서 깨지지 않고 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사진=IOC)한국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스포츠 강국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았다. 냉전 시대 희생양에서 냉전 시대를 종식한 주역이라는 평가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전까지 올림픽은 이념의 진영논리가 참가를 좌우했다.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미국 로스앤젤러스 올림픽(1984년)은 소련을 포함한 공산 진영이 각각 보이콧한 반쪽짜리로 치렀다.서울올림픽은 미소를 비롯한 동서구권이 고르게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밴드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서울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진 단면을 보여준다. 서로 손에 손잡고 반목을 멈추고 화합해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이루자는 희망을 전 세계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방해는 집요했다. 1987년 터진 KAL(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대표적이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탑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국적기를 폭파한 사건이었다. 사건으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대선을 앞두고 거센 북풍이 불었는데, 자연스레 서울올림픽에 대한 테러 우려도 커졌다. 북한은 선전전을 통해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부추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불참한 IOC 회원국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7개국밖에 되지 않았다. 공산권을 상징하는 소련과 동독마저도 선수단을 서울올림픽행 비행기에 태웠다.서울올림픽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던 이유는 체제의 열위 탓이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으로 전락했는데, 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남북은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제 노선으로 택하고 경쟁했다. 한때 북한이 남한을 원조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세계적으로 드러났다.마스코트 호돌이도 큰 사랑을 받았다. 디자이너 김현씨가 그려서 국민 공모를 거쳐 탄생했다. 한국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에 무엇을 한국의 상징으로 입힐지가 관건이었다. 상모가 안성맞춤이었다. 호돌이가 쓴 상모에 달린 물채는 알파벳 ‘S’ 자를 하고 있는데, 올림픽의 역동성과 서울(Seoul)을 나타낸다. 미국 식품사 켈로그사가 자기들 캐릭터 ‘토니 주니어’를 베꼈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올림픽을 계기로 내수 경기는 불같이 일어났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과 올림픽을 즐기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요식업, 관광업, 숙박업 등이 활기를 띠었다. 서울지하철이 4호선까지 깔리면서 활동반경도 확장했다.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으로 소비력이 커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진출한 외국 브랜드가 한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도 됐다.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서울올림픽까지 경기장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시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잣집은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부랑자와 노숙인 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국가폭력 사건으로 규정된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가 커진 데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자유롭지 못하다.
  • 광화문 한복판에 탱크가…국군의날 시가행진 의미는?[그해 오늘]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국군의 날은 매해 10월1일이다. 국군이 6·25전쟁에서 38선을 돌파한 게 이날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애초 육해공군이 따로 기념하던 창군 일을 한데 합쳐 1956년 처음 제정했다. 이날이 국군의 생일인 셈이다.1980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에서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사진=e영상역사관)시가행진(퍼레이드)은 국군의 날 행사를 상징했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장병 제식은 군의 위용을 보여줬다. 군이 자랑하는 무기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으로 전쟁 억제 효과도 기대된다. 최신·첨단 무기를 보유한 우리를 건들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냉전 시대는 군사 퍼레이드만으로 상대국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누구 군사력이 막강한지가 체제의 우월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군사 퍼레이드는 체제를 선전하고 국민 결속을 다지는 측면도 크다.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988년 공개된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낸 국군의 날 행사 보고서를 보면, ‘국군 발전상을 홍보해 군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힌다. 북한이 지난해 정권수립일을 맞아 연 열병식에서 방역부대를 등장시킨 것도 사례다. 코로나 19 대응의지를 보여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이끌어내려는 차원이다. 퍼레이드는 자체만으로 군 전력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기대된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군사 퍼레이드 제일 앞단에 사관생도를 배치하는 것은 예비 군인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이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의식화를 거쳐 군의 사기가 상승한다는 것이다.정권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서 군사 퍼레이드는 시소를 탔다. 군사정권 시절 군사 퍼레이드는 매해 개최됐다. 서울 여의도나 광화문, 서울시청 일대 교통을 통제하고 대규모로 폈다. 이래서 군사 퍼레이드를 군사정권 시절 잔재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횟수가 줄고 규모가 축소됐다. 국군의 날 시가행진은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 게 마지막이다. 문재인 정부가 건군 70주년 행사로 치른 2018년 국군의 날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없었다.건군 65주년 국군의 날인 2013년 10월1일 국군 장병들이 서울시청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일각에서는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외려 장병의 사기를 꺾는다는 시각도 있다. 통상 행사를 준비하려면 늦어도 봄부터 매진해야 한다. 7~9월 여름 무더위를 거치면서 장병은 맥이 빠진다. 행사 당일 도열한 장병이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행사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도 잇달았다. 1977년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두고 비행연습을 하던 육군 대위가, 1990년 낙하훈련을 하던 특전사 여군 하사가 각각 사고로 순직했다. 대외 선전을 위해 발생한 안타까운 희생이었다.시대가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시절 행사를 간소화하면서 “병사들 고충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국군의 날 행사의 근거가 되는 부대관리훈령을 보면 국군의 날 행사는 ‘대통령 취임 첫해는 대규모로 하고 이를 제외하면 소규모로 매해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시가행진’을 행사 부대행사로 구분하고 ‘행사 내용은 매해 세부 내용을 결정한다’고 단서를 뒀다. 시가행진이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시가행진 없이 열린다.
    전재욱 기자 2022.10.01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국군의 날은 매해 10월1일이다. 국군이 6·25전쟁에서 38선을 돌파한 게 이날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애초 육해공군이 따로 기념하던 창군 일을 한데 합쳐 1956년 처음 제정했다. 이날이 국군의 생일인 셈이다.1980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에서 전차가 지나가고 있다.(사진=e영상역사관)시가행진(퍼레이드)은 국군의 날 행사를 상징했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장병 제식은 군의 위용을 보여줬다. 군이 자랑하는 무기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으로 전쟁 억제 효과도 기대된다. 최신·첨단 무기를 보유한 우리를 건들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냉전 시대는 군사 퍼레이드만으로 상대국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누구 군사력이 막강한지가 체제의 우월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군사 퍼레이드는 체제를 선전하고 국민 결속을 다지는 측면도 크다.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988년 공개된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낸 국군의 날 행사 보고서를 보면, ‘국군 발전상을 홍보해 군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힌다. 북한이 지난해 정권수립일을 맞아 연 열병식에서 방역부대를 등장시킨 것도 사례다. 코로나 19 대응의지를 보여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이끌어내려는 차원이다. 퍼레이드는 자체만으로 군 전력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기대된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군사 퍼레이드 제일 앞단에 사관생도를 배치하는 것은 예비 군인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이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의식화를 거쳐 군의 사기가 상승한다는 것이다.정권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서 군사 퍼레이드는 시소를 탔다. 군사정권 시절 군사 퍼레이드는 매해 개최됐다. 서울 여의도나 광화문, 서울시청 일대 교통을 통제하고 대규모로 폈다. 이래서 군사 퍼레이드를 군사정권 시절 잔재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횟수가 줄고 규모가 축소됐다. 국군의 날 시가행진은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 게 마지막이다. 문재인 정부가 건군 70주년 행사로 치른 2018년 국군의 날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없었다.건군 65주년 국군의 날인 2013년 10월1일 국군 장병들이 서울시청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일각에서는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외려 장병의 사기를 꺾는다는 시각도 있다. 통상 행사를 준비하려면 늦어도 봄부터 매진해야 한다. 7~9월 여름 무더위를 거치면서 장병은 맥이 빠진다. 행사 당일 도열한 장병이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행사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도 잇달았다. 1977년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두고 비행연습을 하던 육군 대위가, 1990년 낙하훈련을 하던 특전사 여군 하사가 각각 사고로 순직했다. 대외 선전을 위해 발생한 안타까운 희생이었다.시대가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시절 행사를 간소화하면서 “병사들 고충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국군의 날 행사의 근거가 되는 부대관리훈령을 보면 국군의 날 행사는 ‘대통령 취임 첫해는 대규모로 하고 이를 제외하면 소규모로 매해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시가행진’을 행사 부대행사로 구분하고 ‘행사 내용은 매해 세부 내용을 결정한다’고 단서를 뒀다. 시가행진이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시가행진 없이 열린다.
  • 조두순이 겨우 징역 12년?…국회·정부·법원은 뭐했나[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9년 9월 30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앞서 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냈다. 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사법부 판결 비판은 상당히 이례적이다.이 전 대통령은 “법에서 판단한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그런 사람들은 격리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대통령의 마음이 참담하다”며 “이런 유형의 범죄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여성부와 법무부 등 관계부처가 협력해 방지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이 전 대통령의 비판은 그로부터 6일 전인 2009년 9월 24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8세 아동을 납치·성폭행해 영구장애를 입힌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에 대한 판결이었다. 대법원 판결 후 국민적 공분이 일자 이 전 대통령도 이에 발맞춰 입장을 낸 것이다.징역 12년 복역 후 만기출소한 조두순이 2020년 12월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준법지원센터에서 행정절차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檢, 법 적용 잘못…항소포기로 형량 높일 기회 놓쳐조두순은 악질적 범죄자다. 과거 강간치상으로 3년을 복역했던 조두순은 2008년 12월 안산시 단원구에서 등교 중이던 8세 여아를 폭행하고 기절시켜 성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아동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참혹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영구 장애를 갖게 됐다. 조두순은 경찰에 붙잡혀 강간상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과 법정에서도 변명으로 일관한 조두순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법원의 느슨한 양형기준에 더해 검찰의 안일한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조두순에게 확정된 형벌은 징역 12년, 전자발찌 부착 7년, 신상공개 5년에 불과했다. 1심 법원이 조두순이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감경을 한 결과물이었다. 2009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으로 할 때 조두순에게 내려진 1심 판결은 당시 양형기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1심 재판부도 조두순에 대한 판결 선고 당시 엄벌 필요성을 강조했다. 1심은 “추가 범죄 발생을 막아 이 사회를 보호하고 피고인의 악성을 교화, 개선시키기 위해선 장기간 이 사회에서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애초 법원의 양형기준이 국민 법감정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양형기준은 만 13세 미만을 대상으로 한 강간상해의 경우 기본을 징역 6~9년으로 하되, 가중처벌 요소가 있을 경우 징역 7~11년에 처하도록 했다. 현재 양형기준(기본 징역 9~14년, 가중처벌 시 징역 13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과 비교해 약하다. 더 큰 문제는 검찰이 조두순을 기소하며 13세 미만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을 규정한 성폭력특별법이 아닌 형법상 강간상해죄로 법 적용을 잘못한 것이다. 2008년 시행된 성폭력특별법 해당 조항의 경우 ‘무기나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해 ‘무기나 5년 이상의 징역’인 형법에 비해 형량이 높다.◇조두순 사건 이후에야 성범죄 처벌 강화 속도더욱이 검찰은 1심 결심 공판에서 “조두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정작 1심 판결에 대해선 ‘양형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항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두순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고 하급심 판결에 대해 뒤늦게 공분이 일었지만 검찰이 항소를 하지 않아 2심부턴 형량 상향이 불가능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만 상소한 경우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법원의 원심 판결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없다. 조두순은 수사기관은 물론 법정에서도 범죄 사실 일체를 모두 부인하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출소 후 ‘사과 의향’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뒷짐을 지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진=연합뉴스)검찰이 항소를 한 후 공소장 변경 신청을 통해 형법이 아닌, 형량이 훨씬 높은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했을 경우 조두순에겐 훨씬 무거운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검찰의 항소 포기로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의 수혜를 입은 조두순은 2심과 대법원에서도 “범행을 저지른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행 현장에도 가지 않았다”는 뻔뻔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같은 조두순의 태도에 대해 2심 재판부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범행을 극구 부인하고 있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대법원 판결로 조두순의 최종 형량이 확정되자 여론은 더욱 들끓었고, 국회와 정부 등도 빠르게 움직였다.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강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이 제정돼 2010년 시행에 들어갔다. 대법원 양형위도 2010년 13세 미만 강간상해 범죄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양형기준을 높였다. 국회도 2013년 성범죄처벌법 개정을 통해 성범죄에서의 음주감경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한광범 기자 2022.09.30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9년 9월 30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앞서 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냈다. 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사법부 판결 비판은 상당히 이례적이다.이 전 대통령은 “법에서 판단한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그런 사람들은 격리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대통령의 마음이 참담하다”며 “이런 유형의 범죄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여성부와 법무부 등 관계부처가 협력해 방지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이 전 대통령의 비판은 그로부터 6일 전인 2009년 9월 24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8세 아동을 납치·성폭행해 영구장애를 입힌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에 대한 판결이었다. 대법원 판결 후 국민적 공분이 일자 이 전 대통령도 이에 발맞춰 입장을 낸 것이다.징역 12년 복역 후 만기출소한 조두순이 2020년 12월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준법지원센터에서 행정절차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檢, 법 적용 잘못…항소포기로 형량 높일 기회 놓쳐조두순은 악질적 범죄자다. 과거 강간치상으로 3년을 복역했던 조두순은 2008년 12월 안산시 단원구에서 등교 중이던 8세 여아를 폭행하고 기절시켜 성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아동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참혹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영구 장애를 갖게 됐다. 조두순은 경찰에 붙잡혀 강간상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과 법정에서도 변명으로 일관한 조두순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법원의 느슨한 양형기준에 더해 검찰의 안일한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조두순에게 확정된 형벌은 징역 12년, 전자발찌 부착 7년, 신상공개 5년에 불과했다. 1심 법원이 조두순이 범행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감경을 한 결과물이었다. 2009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으로 할 때 조두순에게 내려진 1심 판결은 당시 양형기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1심 재판부도 조두순에 대한 판결 선고 당시 엄벌 필요성을 강조했다. 1심은 “추가 범죄 발생을 막아 이 사회를 보호하고 피고인의 악성을 교화, 개선시키기 위해선 장기간 이 사회에서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애초 법원의 양형기준이 국민 법감정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양형기준은 만 13세 미만을 대상으로 한 강간상해의 경우 기본을 징역 6~9년으로 하되, 가중처벌 요소가 있을 경우 징역 7~11년에 처하도록 했다. 현재 양형기준(기본 징역 9~14년, 가중처벌 시 징역 13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과 비교해 약하다. 더 큰 문제는 검찰이 조두순을 기소하며 13세 미만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을 규정한 성폭력특별법이 아닌 형법상 강간상해죄로 법 적용을 잘못한 것이다. 2008년 시행된 성폭력특별법 해당 조항의 경우 ‘무기나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해 ‘무기나 5년 이상의 징역’인 형법에 비해 형량이 높다.◇조두순 사건 이후에야 성범죄 처벌 강화 속도더욱이 검찰은 1심 결심 공판에서 “조두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정작 1심 판결에 대해선 ‘양형기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항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두순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고 하급심 판결에 대해 뒤늦게 공분이 일었지만 검찰이 항소를 하지 않아 2심부턴 형량 상향이 불가능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만 상소한 경우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법원의 원심 판결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없다. 조두순은 수사기관은 물론 법정에서도 범죄 사실 일체를 모두 부인하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출소 후 ‘사과 의향’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뒷짐을 지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진=연합뉴스)검찰이 항소를 한 후 공소장 변경 신청을 통해 형법이 아닌, 형량이 훨씬 높은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했을 경우 조두순에겐 훨씬 무거운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검찰의 항소 포기로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의 수혜를 입은 조두순은 2심과 대법원에서도 “범행을 저지른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행 현장에도 가지 않았다”는 뻔뻔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같은 조두순의 태도에 대해 2심 재판부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범행을 극구 부인하고 있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대법원 판결로 조두순의 최종 형량이 확정되자 여론은 더욱 들끓었고, 국회와 정부 등도 빠르게 움직였다.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강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이 제정돼 2010년 시행에 들어갔다. 대법원 양형위도 2010년 13세 미만 강간상해 범죄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양형기준을 높였다. 국회도 2013년 성범죄처벌법 개정을 통해 성범죄에서의 음주감경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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