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도 붙이면 작품…예술이 '혁명'이다[이수연의 아트버스]<5>

▲쿠르트 슈비터스 & 엘 리시츠키 '상식 뒤엎는 실험미술'
1차대전 겪은 충격 '메르츠'로 재해석한 슈비터스
기차표·신문지 뜯어붙인 '도시파편' 새로운 예술로
러시아혁명 새 기운 '프로운'으로 승화한 리시츠키
긴장감 흐르는 색·선·면, 회화 밖 건축·디자인으로
  • 등록 2022-05-20 오전 12:01:00

    수정 2022-05-20 오전 12:01:00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 50 구성’(1922). 자신의 작품에 붙인 명칭이자 예술을 대표하는 개념인 ‘메르츠’를 본격적으로 실험하던 1920년대 작품. 사용한 기차표, 초콜릿 포장지, 신문지 등 각종 폐종이를 콜라주해 완성했다. 회화에서 출발한 메르츠 작업은 점차 발전해 이차원 평면작업을 거쳐 삼차원 오브제로 발전했다. 하찮은 폐품이나 쓰레기조차 조형성을 가진 작품으로 승화시킨 슈비터스는 이후 정크아트의 선구자로 재평가됐다. 종이콜라주, 20.2×16.0㎝, 헝가리 부다페스트미술관


까마득히 오래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린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기원’이란 것을 말입니다. 문자를 대신한 소통이 예술의 목적, 그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예술은, 또 미술은 다른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달고, 휴머니즘을 달고, 상상력을 달았습니다. 20세기쯤 오자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딛고 서서 인간의 꿈이 도달할 그 너머를 꿈꿨던 겁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영역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NFT에다가 메타버스에까지 닿아 있지 않습니까. 오랜시간 현대미술의 진격을 지켜봐온 이수연 학예연구사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비로소 가능했던, 예술의 창조적인 경계의 확장을 가져온 미술거장의 삶과 작품 읽기를 통해 예술로 꾸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그 드넓은 ‘아트버스’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고민에 빠지곤 한다. 치열하게 살던 작가의 삶과 예술적 성취를 이해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 위대한 예술은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의 변화가 예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수많은 예술가들 역시 이 같은 질문을 무수히 던져왔다. 하지만 20세기 유럽을 전화로 몰아넣었던 제1·2차 세계대전만큼 예술에 대한 회의가 극에 달했던 때도 드물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국가제도의 정비, 철학·미학·예술의 성취로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고 자부했던 유럽 지성인들은 전쟁의 광기와 야만에 휩쓸려 스스로를 철저하게 부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그 시대, 타고 남은 절망 속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예술을 대신할 새로운 뭔가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난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는 밝은 꿈에 차서 예술을 노래하며 인상주의 회화를 그리던 젊은 작가였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꿈, 아니 그의 예술을 바꿔버렸다. 1차대전 중 징집돼 하노버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게 된 이후 슈비터스는 인간 문명의 어둠을 표현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특히 20세기 문명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기계와 자본을 예술적 표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로 전후 사람들 삶 투영

1918년 1차대전이 끝날 즈음 슈비터스는 그간 배운 예술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메르츠’(Merz·하위문화를 재료로 삼은 순수예술)다. 메르츠는 예술의 위대함이 끝난 곳에서 출발한다. 메르츠란 단어 자체가 신문에서 우연히 무작위로 오려낸 글자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슈비터스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곳곳에서 사탕껍질, 천조각, 티켓, 성냥갑, 찢어진 신문지, 가격표 등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를 주워모았고, 이 쓸모없는 파편을 색채와 톤, 질감, 시각적 밀도 등에 따라 재배치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 심리적 콜라주를 만들어냈다. 콜라주는 전혀 상관없는 재료를 선택하고 잘라붙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기법이다. 슈비터스는 공장에서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고 재배치할 수 있듯, 예술도 현실을 분해하고 조립하고 재비치해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시의 부스러기와 파편들은 새로운 예술인 메르츠 속에 빨려들어갔다.

그 초기작이라 할 ‘메르츠 50 구성’(1922)은 기차표, 초콜릿 포장지, 신문지 외에도 각종 쓰레기종이를 재료로 콜라주한 작업이다.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톤을 가진 조각으로 구성한 이 작업은 대체로 평면적 추상적인 경향을 보이지만, 간간이 보이는 인쇄글자들이 현재로선 알 수 없는 당시의 거리풍경을 짐작케 한다. 오른쪽 아래에 카카오라 적힌 초콜릿 포장지, 위쪽의 숫자 50 등. 하지만 메르츠를 처음 본 당시 사람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빛나는 가치를 추구하던 예술이, 한 시즌 일상으로 훅 들어왔다가 계절이 바뀌면서 사라지는, 광고 전단지와 신문지 뉴스처럼 변하고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의 조합이 됐으니 말이다. 메르츠는 1923년부터 독일에서 24회에 걸쳐 잡지로 발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슈비터스는 결국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가’로 낙인 찍힌 뒤 2차대전 중 망명한 영국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회화서 건축으로 삶을 바꾸는 정거장 된 ‘프로운’

슈비터스가 메르츠로 독일에서 예술의 대안을 제시했다면, 비슷한 시기 러시아에서는 엘 리시츠키(1890∼1941)가 또 다른 대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국 치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미술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리시츠키는 독일에서 유학한 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할 무렵 러시아로 돌아왔다. 당시 러시아는 혼란한 시대상 그 자체였다. 대중은 1차대전 참전 여파로 생활고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능한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몰아내기 위해 1917년 혁명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 4B’(1919∼1920·왼쪽)와 ‘프로운 1C’(1919). 절대주의 회화를 3차원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회화양식이던 리시츠키의 ‘프로운’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초기 그래픽디자인의 발달을 주도한 이 작업은 이후 예술과 사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건 물론, 건축 등 실용적 미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캔버스에 유채(4B), 패널에 유채(1C),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소장.


리시츠키는 혁명의 기운을 품어낼 새로운 예술을 찾기에 골몰했다. 유대교 전통,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책디자인 등 다양한 방면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러던 중 절대주의를 창시한 거장 카지미르 말레비치를 만나게 된다. 절대주의는 명예·권력·부를 그리거나 서정적 감성으로 자연풍경을 묘사하던 구시대 예술을 버리고, 오로지 색과 선을 이용해 순수 인간 정신의 정수를 표현하려 한 사조다. 하지만 ‘세상에서 해방되는 예술을 위해 색과 선조차도 버리자’며 극도의 정신성을 추구하던 말레비치와 달리 리시츠키는 예술의 ‘실용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색·면·선의 조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를 회화 바깥인 건축·디자인분야로 끌어내 실제 삶을 바꾸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예술이 ‘프로운’(Proun)이다.

프로운은 러시아어로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뜻을 가졌지만, 리시츠키는 이를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예술가는 붓과 펜으로 세상에 없던 상징을 만들어낸다. 그 새로운 상징이 회화에서 건축으로 바뀌어 실제 삶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정거장이 프로운이다.” 실제로 프로운의 작업은 건축의 기본단위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공간구성 실험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프로운 4B’(1919∼1920)와 ‘프로운 1C’(1919)는, 1919∼1927년경 방대한 프로운을 생산하던 리시츠키의 작업을 잘 보여준다. 둘 다 이차원 평면과 삼차원 입체공간을 오가는 색·선·면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리시츠키의 작품을 앞에 둔 감상자들은 “대체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는 푸념을 꺼내놨는데, 작품의 내용을 해석할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프로운 4B’를 보곤 붉은색 짧은 선이 제일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이 선이 수직을 이루는 사각면체들을 찔러댄다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또 ‘프로운 1C’를 보곤 검은색 사각형을 배경으로 해 튀어나온 듯한 베이지색 사각면체가 어떻게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을까 한다면, 리시츠키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리시츠키가 생각한 프로운은 과거 전통에 미련을 두지 않은 새로운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예술이었다. 실제로 1923년 이 프로운 시리즈는 독일 베를린 한 전시공간에 구현됐으며, 공간 속에서 힘의 균형을 다룬 리시츠키의 작업이 이후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친 건 물론이다.

엘 리시츠키의 ‘쿠르트 슈비터스’(1925). 1922년 하노버를 방문했던 리시츠키가 제작했다. 슈비터스의 파격적인 사진 두 장을, 리시츠키가 협업한 ‘메르츠’ 1924년 7월호 이미지 등과 합쳐 만들었다. 젤라틴 실버프린트,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미술관 소장.


격동의 시대에 새로운 예술을 꿈꾸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있었던 두 작가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예술을 꿈꿨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슈비터스와 리시츠키는 당시 실험을 하던 일군의 작가들과 함께 어울려 만나기도 했는데, 이들의 만남은 1922년 하노버를 방문했던 리시츠키가 제작한 ‘쿠르트 슈비터스’(1925)로 엿볼 수 있다.

리시츠키와 협업하기도 한 잡지 ‘메르츠’(1924년 7월호)의 사진·글자 위에 겹친 슈비터스의 사진 두 장은, 정면을 응시한 눈과 벌린 입 등을 통해 마치 새로운 것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발언하고자 했던 이들의 도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번 노출돼 흐릿한 사진처럼 모호하던 그들의 꿈은 여전히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태도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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