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이 작품]자기 이야기가 가져오는 치유와 구원

-심사위원 리뷰
이성열 연출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
고승범 작가의 자전적 연극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 다뤄
  • 등록 2022-08-11 오전 6:00:00

    수정 2022-08-11 오전 6:00:00

[김미희 연극평론가] 이성열 연출의 ‘서교동에서 죽다’(7.1~17, 씨어터 쿰)가 지난해 6월 짧게 선보인 후 1년 만에 같은 공간에서 다시 관객을 맞았다. 실향민의 후예로 미국에 거주하며 작품을 발표해온 고승범이 자신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희곡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부여잡고 마침내 풀어놓은 자전적 이야기로, 자기 치유와 구원을 찾아가는 연극이다.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의 한 장면. (사진=극단 백수광부)
미국에 사는 59세 진영이 암이 재발한 누나를 보러 한국에 돌아와 조카 도연을 만나며 자신의 아픈 개인사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과거 어느 특정한 날의 풍경을 복원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는 도연을 통해 진영은 1974년의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기억으로 소환해 낸다.

서교동에서 살던 진영의 가족은 부친의 사업실패로 화곡동 시장통으로 이사를 하며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 부친은 간경화로 누워있었고, 모친은 과일장사에 바빴으며, 형 진석은 장남의 기대를 안고 학원다니기에 바빴고, 누나 진희는 집안일을 떠맡았다. 차남 진영은 어린 동생 진수를 돌보며 아버지의 약심부름과 집안 연탄불 관리를 책임져야 했다. 부친의 심부름으로 작은 아버지댁으로 돈을 빌리러 가는 날이면 수치심으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날 돈 심부름을 위해 동생 진수에게 연탄갈이를 맡기고 나갔다 돌아온 진영은 연탄가스에 중독돼 쓰러진 동생을 발견한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동생이 죽은 그해 겨울, 진영은 자신도 죽었다고 선언한다. 현재 치매에 걸린 모친의 시간도 1974년에 멈춰있다.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의 한 장면. (사진=극단 백수광부)
무대는 현재와 1974년 그 날의 풍경들을 수시로 넘나든다. 배우의 연기 공간에 따라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의 세계로 변신한다. 나무판자로 덮여 있는 무대, 쓰러질 듯 경사져 틈새가 벌어진 바닥은 밟으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1974년 위태롭던 진영의 집을 시각화했다.

진영의 1974년 세상은 외롭고 갑갑하고 억압적이었다. 탈출을 꿈꾸던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동생의 죽음에 대한 그의 죄의식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도연의 글쓰기로 인해 진영은 50여 년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을 조카에게 들려주고, 조카가 삼촌의 기억을 토대로 소설 ‘서교동에서 죽다’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작가가 자기의 내면과 정면으로 만나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놓는 솔직함과 용기는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유진 오닐을 연상시킨다. 다만 고승범은 오닐처럼 사실주의적 방식으로 풀지 않았다. 자기연민을 피하기 위해 보다 냉철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진영이 등장인물과 내레이터 사이를 드나들고, 도연이 그의 청자로 존재하는 이유다. 연극은 파편적이고 부정확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 사실의 진위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가슴 한 켠에 자신을 붙들고 있는 아픔과 화해하고 자기치유에 이를 수 있다고 일깨운다.

모든 연기자들이 균형감 있고 절제 있는 연기로 연극의 완성도를 높였지만 박완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영혼 진영 역을 유머러스하고 건들건들한 연기로 너무도 독창적으로 구현해 냈다.

고승범의 대학 연극반 동기인 이성열 연출은 누구보다 작가를 잘 이해하는 듯하다. 작은 소극장 공간에서 효율적인 공간 구획으로 과거와 현재를 드나드는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진영의 자기 이야기에 거리를 두게 하면서도 관객의 가슴을 멍멍하게 만드는 노련한 연출력을 보였다.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의 한 장면. (사진=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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