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아이를 버렸습니다

부정 수급 충격 뒤 가려진 베이비박스 그늘
베이비박스 찬반, 10년 지났지만 해결은 미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책임져야 할 문제
  • 등록 2019-07-29 오전 7:30:00

    수정 2023-03-23 오후 4:54:47

[이데일리 윤로빈 PD] 얼마 전 베이비박스를 운영해온 주사랑교회 이종락 목사가 억대에 달하는 기초생활비 부정 수급으로 고발 당해 조사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여론은 ‘아이를 위탁하고 양육하는 데 경제적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냐’는 반응과 ‘역시 민간 복지단체를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는 민간이 운영하는 베이비박스와 유아유기 해결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인다.

냉정히 말해 베이비박스가 영아유기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아이를 유기하게 되는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유기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고 민간차원에서 이를 감당하기엔 재정적으로나, 법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와 같이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민간단체나 개인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는 등 예상치 못한 일이 있을 경우 대안책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영아유기는 계속된다
지난 3월, 무궁화호 열차 화장실에서 숨진 신생아가 발견되었다. 아이를 유기한 사람은 대학생 B씨. 열차 화장실에서 아이를 출산한 후 유기했으나, 해당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죄책감을 느껴 경찰에 자수했다.

매년 언론을 통해 많은 영아 유기 사건이 알려지지만, 실질적인 대책 마련은 느린 걸음을 걷고 있다. 한해 발생하는 영아유기 사건은 100여건. 추산되지 않은 사건(알려지지 않았거나, 베이비박스를 통해 발생한 영아 유기 사건 등)까지 합치면 매년 약 300-400명 이상의 영아가 유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 최초의 베이비박스를 만든 주사랑교회 이종락 목사
베이비박스, 그 후 10년
2007년 봄 새벽, 한 교회 앞에 생선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교회의 목사는 박스 안에 체온이 떨어진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 품에 안았다. 목사는 유기되는 아이들의 목숨을 구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관악구 주사랑교회 앞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베이비박스다.

베이비박스 안에는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와 CCTV가 설치되어 있다. 부모가 아이를 유기하면 봉사자들이 아이를 거두고, 아이를 데려온 부모를 붙잡아 상담을 한다. 상담을 통해 아기를 양육할 것을 권유하고 그럴 수 없다면 출생신고라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베이비박스에 대한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찬사를 표했으나, 곧 반대여론도 나타났다. 베이비박스 운영에서 파생되는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10년의 시간 동안, 이에 대한 찬반논쟁과 영아유기 문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사실 베이비박스 운영은 불법이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놓고 가는 것은 엄연히 영아유기죄에 해당하며, 베이비박스 자체도 불법시설물이다. 그러나 정부는 불법시설물인 베이비박스를 여전히 두고 있으며,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한 부모를 적극적으로 입건하지 못하고 있다. 베이비박스 운영을 불법적 행위로 보고 적극 처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찬반논쟁이 여전히 팽배한 데다, 베이비박스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이 없는 탓이다. 보건복지부는 2014년, 부득이하게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부모들이 존재하는 이상 베이비박스를 당장 폐쇄하기 어렵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베이비박스는 영아유기에 대해 정부역할의 공백을 민간 차원에서 채우는 임시방편이었다.

▲ 오신환 의원을 비롯한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비밀출산법을 발의한 바 있다.
말로만 문제, 바뀐 건 없다 2014년 유엔 아동인권 위원회는 베이비박스 운영 중단을 권고한 바 있다. 아동의 ‘부모를 알 권리’와 부모의 ‘자녀 양육 관련 국가지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더불어 베이비박스로 인해 아이 유기가 발생하는 환경 문제 개선에 더욱 안이해지고, 부모의 죄책감을 덜어냄으로써 아이 유기를 조장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베이비박스 설치 금지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으며,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미국, 프랑스 등의 경우 관련 법안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민간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의 운영을 주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오랜 기간 베이비박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되어왔으나 크게 바뀐 것은 없다.

아동유기를 예방하기 위해 ‘비밀출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오신환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했으나, 해당 건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비밀출산법은 산모가 원할 경우 익명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제도다. 산모가 양육을 포기할 시, 국가가 즉각 개입해 아이를 보호하고 입양 절차를 지원한다. 이를 통해 임신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병원을 꺼렸던 비혼부모들이 의료기관을 찾도록 유도해 산모와 아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또한 산모의 의사에 따라 국가가 지체 없이 아이를 위탁하기 때문에 아이가 위험에 빠지는 일을 줄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역시 부모의 양육포기를 조장한다는 우려가 있으나, 현재의 민간 베이비박스 운영보다는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많다.

▲ 서울 관악구 주사랑교회 앞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누가 베이비박스를 만들었나 영아유기를 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10대와 20대의 비혼 부모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쏟아질 사회적 시선과 창창한 앞날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아이를 유기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학업과 진로 등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외도나 강간 등으로 태어난 아이 역시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기를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상당수의 영아유기 사건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외면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영아유기 예방책은 우리 사회가 한부모 가족, 비혼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편견이나 특정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결국 영아유기와 베이비박스 문제의 책임에서 우리 사회의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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