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섞여 시대의 애환 노래…민중시인 신경림 타계(종합)

22일 암투병 끝 88세로 별세
소외 편에 서 가장 따뜻한 시 쓰다
창비시선 1호 ‘농무’ 기념비 작품
그늘진 삶 천착, 민중의 애환 그려
'가난한 사랑 노래' 교과서 수록도
도종환 시인 "가슴 먹먹해" 애도
  • 등록 2024-05-23 오전 6:00:00

    수정 2024-05-23 오전 6:00:00

시인 신경림(사진=창비ⓒ류우종).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이것이 이를테면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진 소박한 소신이었다.”(신경림 시집 ‘농무’ 중 ‘시인의 말’에서).

한국 민중 시의 장을 연 신경림 시인이 22일 타계했다. 향년 88세.

문단에 따르면, 그동안 암 투병 중이던 시인은 이날 오전 8시17분께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민초들과 더불어 저잣거리에 섞여 살면서 그들의 굴곡진 삶의 풍경과 애환을 질박하고 친근한 생활 언어로 노래해 온 ‘민중적 서정시인’이었다.

신경림 시인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의 작품이 추천돼 등단했다. 이후 낙향한 그는 광부와 농부, 장사꾼, 인부, 강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10년 넘도록 시를 쓰지 않기도 했다. 그간의 경험은 곧 민중의 고달픔을 달래는 시로 재탄생했다.

자비로 낸 그의 첫 시집 ‘농무’는 1973년 ‘월간문학사’에서 간행됐다가 1975년 창비에서 17편의 시를 추가해 창비시선 1호(증보판)로 출간했다. 올해 3월 500호를 펴낸 창비시선은 당시 기자 간담회에서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1970년대 난해한 모더니즘과 구체적 삶이 결여된 서정시만 존재하던 시단에 농촌(민중)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농무’는 혁명적인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10만 권 넘게 팔린 시집 ‘농무’는 한국 시집의 상업 출판 시대를 열며 창비시선이 지속적으로 발간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을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시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교과서에도 실렸던 그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1988)는 여전히 많은 독자가 즐겨 찾는 애송시다.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시작 활동을 이어가며 ‘새재’(1979), ‘민요기행 1’(1985), ‘남한강’(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갈대’(1996), ‘사진관집 이층’(2014) 등 여러 시집을 냈다.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 시론집도 남겼다.

시인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못난 사람 편에 서서 가장 따뜻한 시를 썼던 분”이라며 “우리 현대시의 아버지 같은 분으로 그가 없는 한국 문단, 한국 시단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애도했다. 이어 “내년이 시집 ‘농무’를 펴낸 지 50년이 되는 해”라면서 “우리나라의 시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전환하는 시작을 열고, 민중의 그늘진 삶에 천착해온 시인”이라고 기억했다.

고인은 생전에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예술부문), 4·19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동국대학교 국문과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다. 장례는 주요 문인단체들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발인은 25일 오전 5시 30분, 장지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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