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시작됐다. 67세 여성인 피해자는 2022년 9월 말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가해자는 이를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피해자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도어락을 파손하는 것은 물론, “너를 죽이겠다”는 음성메시지까지 보냈다.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을 받고도 28차례나 전화를 걸었고, 피해자가 번호를 차단한 후에도 집요하게 연락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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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수신차단 표시’의 법적 성격이었다. 1심 법원은 수신차단 표시는 단순히 휴대전화의 기능에 의해 생성된 것일 뿐, 가해자가 전자적 방식으로 송신한 것이 아니라고 봤다. 2심 역시 이러한 해석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러한 해석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전화를 거는 순간 ‘통화를 원한다’는 정보가 전달되고, 이것이 수신차단 표시로 변환되어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수신차단 표시도 엄연히 가해자의 행위로 인한 결과라고 본 것이다.
이번 판결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디지털 스토킹의 진화 양상을 법원이 정확히 포착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스토킹은 주로 물리적 접근이나 직접적인 연락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SNS 메시지, 이메일,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앱)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법원은 이러한 디지털 스토킹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 판단했다. 단순히 전화나 메시지의 ‘도달’ 여부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지속적인 연락 시도가 피해자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중요하게 봤다. 이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스토킹에 대해서도 법원이 적절한 해석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불어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는 많은 피해자들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신고를 주저하거나, 신고를 하더라도 수사기관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수신차단 기록이나 부재중 전화 기록만으로도 스토킹 범죄를 입증할 수 있게 됐다. 이는 피해자들이 보다 용이하게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토킹 피해자들은 이제 더욱 든든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수신차단 기록만으로도 가해자의 지속적 괴롭힘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잠재적 가해자들은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연락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희봉 변호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행정법원·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서울지방변호사회 청년변호사특별위원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