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현식 기자] “아저씨, 정말 슈타지(Stasi)에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동독의 한 골목길. 한 꼬마가 자신의 축구공을 주워준 남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남자가 “너 슈타지가 뭔지는 아니?”라고 되묻자 꼬마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네, 나쁜 사람들인데 사람들을 감옥에 가둔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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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을 주운 남자의 이름은 게르트 비즐러. 그는 약칭 슈타지로 통하는 동독 국가보위부 소속 비밀 경찰이다. 직급은 대위. 반체제 인사를 대상으로 한 심문·감청 전문가로 정평 나 있는 인물로 국가보위부 요원 양성을 위한 비밀 훈련 기관의 강사까지 맡고 있다.
연극 ‘타인의 삶’은 그런 비즐러가 동독을 넘어 서독에서도 영향력을 끼치는 극작가 게오르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를 도청하는 비밀 작전의 담당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동명의 독일 영화를 연극 무대로 옮겨왔다.
투명 진열장, 테이블과 의자, 1980년대풍 전화기와 감청 장치 정도로 단출하게 꾸민 서늘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무대에서 슈타지와 예술계 두 부류에 속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비즐러가 마치 그림자처럼 그라이만과 크리스타의 곁에 머물며 감청을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알아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나간다.
|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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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초점은 비즐러의 심리 변화에 맞춰져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 헌신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처럼 살아가던 냉혈한 비즐러가 무소불위 권력에 의해 수난을 겪는 예술가들에게 연민을 느낀 뒤 그들의 비밀을 감춰주기 시작하면서 극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다수의 배우가 일인 다역을 소화하며 예술가들의 고뇌와 저항에 관한 내용까지 비중 있게 다루는 극에 풍성함을 더한다. 무대 양편에는 배우들을 위한 대기 의자를 비치해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에 놓인 듯한 연출로 소재성을 극대화한다.
타인의 삶에 천착하던 주인공이 내면의 선의를 발현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선의는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나아가 이념을 뛰어넘는 인류애의 가치를 일깨운다. 극의 말미에 드라이만이 허공에 흩뿌려진 감청 기록지를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이 압권이다.
|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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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벚꽃동산’의 연출가 손상규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무대에는 윤나무·이동휘(비즐러 역), 정승길·김준한(드라이만 역), 최희서(크리스타 역), 김정호(브루노 햄프 장관 역), 이호철(그루비츠 역), 박성민(멀티 역) 등이 오른다. 각각 비즐러와 드라이만 역을 맡는 이동휘와 김준한은 이번 작품 출연을 계기로 연극계에 정식으로 첫발을 들였다.
‘타인의 삶’은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개막했다. 공연은 내년 1월 19일까지 이어진다. 러닝타임은 인터미션 없이 11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