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명은 영화 ‘행복의 나라’ 개봉을 앞둔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이선균 분)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유재명은 극 중 10.26 대통령 암살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합동수사단장(합수부장)이자 당대 권력의 상징과도 같던 신군부 세력을 이끈 인물 ‘전상두’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행복의 나라’는 70년대 후반~80년대 초, 민주주의를 위협했던 두 줄기의 큰 사건 ‘10.26 사태’와 ‘12.12 사태’ 사이에 발생한 대통령 암살사건 재판 실화를 소재로 내세워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앞서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등 10.26 대통령 피살 사건 및 12.12 군사반란 실화를 소재로 다뤘던 근현대사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울림을 선사하며 흥행에 성공한 사례가 있어서다. ‘행복의 나라’는 두 영화가 다룬 시점의 사이에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을 다룬 만큼, ‘남산의 부장’과 ‘서울의 봄’이 구축한 한국영화 ‘근현대사 유니버스’의 마지막 남은 퍼즐 한 조각을 맞출 또 다른 새롭고 강렬한 작품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유재명은 ‘전상두’를 통해 술수에 능하며 진실을 은폐하려는 권력자의 야망을 표현해냈다. 유재명이 연기한 ‘전상두’란 인물은 앞서 지난해 개봉해 천만 영화에 등극한 ‘서울의 봄’의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 캐릭터와 같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유재명은 캐스팅 과정에 대해 묻자 “여담이지만 처음 대본 받았을 땐 정중히 거절했었다”고 털어놔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전상두란 인물이 안개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의 이야기를 빌드업하거나 해석을 섞어 표현하기엔 분량적으로도 그렇고 어딘가 조금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느낌을 받았다”며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워낙 강력한 이미지의 캐릭터라 정중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인물이 자꾸만 떠오르더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인데 계속 생각이 났다”고 회상했다.
‘서울의 봄’ 전두광부터 ‘남산의 부장들’ 전두혁 등 ‘행복의 나라’와 같은 시대, ‘전상두’와 같은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의 계보가 최근 수년간 꾸준히 이어져왔다. 이에 대해 유재명은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그리고 우리 작품인 ‘행복의 나라’까지 그 시대를 다룬 작품들이 연작처럼 나오고 있는 상황 자체가 고무적인 현상”이라며 “우리 시대가 이젠 그만큼 예민하고 정치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과거사 문제들을 작품으로 만들 만큼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세 작품 각각의 매력, 각자의 장점에 포커스를 맞춰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전작 ‘킹메이커’에선 제가 김영삼이란 실존 인물을 연기한 적이 있는데,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이미지나 말투, 살아온 길을 생각하는 일종의 선입견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전상두’를 만들며 실존 인물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하면 거짓말이다”라고도 토로했다.
유재명은 고민 끝에 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 ‘전상두’란 인물이 가져야 할 위치에 초점을 맞춰 연기에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 선배가 표현하신 인물은 뜨겁고 폭발적인, 어떠한 카리스마적 면모가 드러났다면 ‘행복의 나라’ 전상두는 조용히 술수와 편법을 부리며 상대를 가지고 노는 듯한 뉘앙스에 가깝다. 조용히 자신만의 야욕을 꿈꾸는 인물로 그리려 했다. 촬영 당시 ‘서울의 봄’의 존재를 몰랐기에 더 그런 방식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서울의 봄’의 존재를 알았다면 연기하면서 헷갈렸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어느 순간 실존인물과 관련한 참고 자료에도 의존하지 않게 됐다고 전했다. 유재명은 “초반에는 영상도 찾아보고, 이 사람의 삶의 과정을 공부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더라. 말씀드렸듯 이 캐릭터가 우리 작품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만약 이 캐릭터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더 많고, 빌드업할게 더 있었다면 지금과 달리 더 강력한 그의 모습을 그리려 애를 썼을 거다. 솔직히 배우는 자신이 더 강력히 보이길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면서도 “하지만 분량이 많지 않았기에 거기서 딜레마가 시작됐다. 오히려 분량이 많지 않았기에 박태주나 정인후 등 다른 인물들의 연기를 가만히 지켜보며 저들의 사이를 권력으로 지그시 누르고, 연기적인 리듬을 이어줘야겠단 답이 도출된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추창민 감독과 한 신 한 신을 최대 10가지 버전으로 찍어가며 치열히 캐릭터를 완성해갔다. 유재명은 “오케이가 난 신도 감독님은 ‘재명 씨 혹시 다르게 표현하고 싶으신 게 있냐’고 물으셨다. 어떤 신은 버전이 한 10개 정도 나오더라”며 “추창민 감독님은 좋은 의미로 집요하고 뚝심이 있으시지만 열려 계신 분이다. 그 덕에 ‘행복의 나라’가 좋은 밸런스를 갖출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다만 “실존인물이 워낙 현대사에서 큰 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실존 인물과 캐릭터 간 간극은 촬영 내내 날 따라다녔다. 보는 내내 그것들이 떨쳐지지 않았다”고도 토로했다.
한편 ‘행복의 나라’는 오는 14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