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의 나라살림]미국이 포퓰리즘을 피한 방법

안종범 정책평가연구원장
  • 등록 2024-05-23 오전 6:15:00

    수정 2024-05-23 오전 6:15:00

[안종범 정책평가연구원 원장]우리나라에서 정치는 가장 낙후된 골칫덩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을 좌우할 정도로 힘이 막중하다. 그 나라의 정치는 국민의 자화상이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 국민은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갈라져 싸우고 있다. 진영의 그 어떤 논리로도, 그 누구의 중재로도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다.

이제 정책으로 이 싸움을 멈추고 또 정치를 바로 잡아야 한다. 진영이나 이념을 초월한 과학으로 무장한 정책만이 길이다. 정책을 사전에 그리고 사후에 과학적으로 평가한다면 적어도 정책을 놓고서는 대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은 평가가 핵심이다. 국민은 정책의 대상이고 정책에 따른 국민의 반응은 평가의 대상이다. 특정 정책을 시행하기 전후 국민의 소비, 근로 등의 행동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정책평가의 핵심이다. 지금의 과학 수준이 역사상 최고라는 점에서 정책평가 또한 어느 때보다 잘할 수 있다. 정책분석 기법과 정책 데이터라는 두 가지 ‘정책평가 인프라’가 컴퓨터의 발달과 통계분석의 발전으로 최고조에 달해 있다. 20년 전 정책효과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려면 며칠 걸리던 것이 이제는 불과 몇 분 만에 가능하다.

분석 대상이 되는 정책 데이터도 과거에는 없거나 부족했는데 이제는 넘쳐난다. 정책대상인 국민의 행동 결과는 데이터로 쌓이고, 실시간 엄청난 양의 정보가 빅데이터로 구축되기까지 한다. 건강보험, 고용보험, 납세자료, 교육자료 등과 같은 공공데이터가 질적 양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노동부, 보건복지부 등 대부분 사회부처는 노동패널, 복지패널 등 동일 가구나 개인을 대상으로 매년 추적조사하는 패널데이터도 구축하고 있다.

정책평가에서의 걸림돌은 잦은 정책변화이다. 새 정책을 시도하거나 기존 정책을 개편하는 경우, 정책변화 이전과 이후의 효과를 대상자들의 행동 변화를 관찰해서 분석해야 한다. 그런데 워낙 자주 정책을 바꾸다 보니 어느 정책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나를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높은 수준의 정책평가 인프라로 이 또한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정책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중차대한 정책을 너무 쉽게 결정했다. 시행 후에도 뭐가 잘되고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의약분업, 무상급식, 최저임금 인상 등 중요 정책을 도입할 때 사전평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2021년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을 지급할 때, 미국같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유럽식으로 기존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하는 형태로 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평가 없이 일단 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아직도 여러 나라에서는 코로나 국민지원금이 경제 안정성과 빈곤 및 불평등 감소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근로의욕 저하 측면에서는 부정적이라는 사후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3년이 지난 지금 상생 국민지원금의 사후평가에 관한 관심 없이 또 다른 전 국민 대상 지원금 지급을 꺼내 놓고 있다.

정치권에서 무작정 꺼내고 있는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 정책 역시 그동안 핀란드, 캐나다, 스페인,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는 철저한 사전평가 과정을 거쳤다. 현재까지 어떤 나라도 보편적 기본소득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한 사례는 없다. 빈곤 감소와 같은 이점이 있지만, 높은 재정 비용과 인플레이션 초래 등 경제적 영향에서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려해 신중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의하면 혜택 수준에 따라 비용은 국내총생산(GDP)의 10∼30%에 이른다. 세금인상, 기존 복지감축, 정부채권발행, 새로운 수익원 창출 등 재원조달방안에 따라서도 평가가 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여느 때처럼 막중한 정책을 새로 도입하려 하는데 그 어떤 과학적인 사전평가도 거론되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한 사회정책을 도입하기 전에는 사회적 실험을 해왔다.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학의 실험이 아니라 국민을 대상으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다. 특히 미국은 정책효과를 평가하는 사회적 실험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의학계에서 주로 사용하던 무작위 통제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s: RCT)을 활용해왔다. RCT는 정책 대상으로 무작위로 선정한 실험군(Treatment Group)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Control Group)의 행태변화를 일정 기간 동안 비교한다.

1996년 클린턴 복지개혁의 핵심이었던 빈곤가정 임시지원(TANF: Temporary Assistance for Needy Families)과 1970년대의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실험들은 대표적 RCT 사례라 하겠다. 이들 정책은 각종 지원프로그램이 갖는 근로의욕 저하와 복지의존(welfare dependency) 문제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초기 RCT 사례 중 하나로서 1962년에 시작된 페리(Perry) 유치원 프로젝트도 흥미롭다. 더 좋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는 주거 바우처를 받는 실험군과 바우처를 받지 않는 대조군으로 무작위 배정한 뒤 고용, 소득, 교육, 건강 등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했다. 그 결과 불리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고품질 유아 교육의 장기적 혜택을 입증했다.

우리도 정책을 실험해보고 시행해야 한다. 정책으로 국민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실험해서 평가한 뒤 시행 여부와 수정·보완 사항을 결정해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풍부한 데이터 환경에 걸맞게 근거기반 정책평가(Evidence-Based Policy Evaluation)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지금 거론되는 ‘25만 원 민생지원금’부터 사전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저출생 대책으로 시도할 정책들도 RCT 등을 활용한 사전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 부총리급으로 출범한다는 저출생 대책부처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저출생 대책으로 새롭게 제기되는 이민정책 개혁의 정책대안들에 대해서도 RCT를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정책을 실험을 통해 제대로 평가하면 ‘정책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올 수 있다. 그러면 포퓰리즘을 몰아낼 수 있어서 국민이 뒤늦게 후회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상식이 통하고 과학이 중시되는 세상이 올 수 있다. 그러려면 국민은 지금 벌이는 싸움을 멈추고 정책에 눈을 뜨고 더욱 냉정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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