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2년 9월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실은 공군 1호기가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43년 만에 처음 한국인이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톈안먼(천안문·天安門) 광장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는 모습은 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 지난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양상곤 중국 국가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사진=e영상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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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들어 동북아의 정세는 요동쳤다. 노 대통령의 3박 4일간 중국 공식 방문은 양상쿤(양상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 냉전의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성국가로 분류하던 사이였다.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본격적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취임사를 바탕으로 노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7일에는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했고 북방 대륙국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7선언은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노태우 정부는 냉전체제의 해체와 발맞춰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한 역시 북방외교의 구상에 담아냈다.
그 일환으로 한국과 중국은 8월 24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대만과 단교를 하면서까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의 발전적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로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북한과 대만을 압박하고자 했던 우리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등에 부속돼 체제를 유지해오던 북한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카드였다. 중국 역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보이던 중국과, 13억 인구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밀착했다. 1992년 64억 달러(약 9조원)이던 대중 교역은 2021년 3015억 달러(431조)를 넘어서 47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중국은 우리나라의 1위 교역 대상국(24%)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