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문가라는 당신들이 잡아낸 게 뭐가 있어?” 물론 이 정도까진 아니다. 하지만 쏟아부을 작정은 했다. 대상은 ‘경제전문가’란 사람들이다. 더도 말고 딱 잘라 지난 10년. 그들이 잘못 판단한 근거와 결정을 조목조목 들이댈 참이다. ‘2008년 금융위기’는 시작일 뿐 ‘중국의 성장세 둔화’ ‘미국의 경기회복’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인플레이션 귀환’ ‘반유럽연합과 반유로화 움직임’ 등등.
안다.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세상이 어디 이들만의 탓이겠나. 그래도 전문가라면 말이다. 이처럼 굵직한 사건이 앞서 보내는 ‘시그널’(signal·신호) 정도는 간파했어야 했다는 게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란 거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란다. 해박한 경제지식? 스마트한 정보력? 다 필요 없고, 그저 “두 눈만 부릅뜨고 있으면” 다 보인단다. 그러니 더 기가 막힐밖에. 숫자·통계, 수학적 방법론, 빅데이터, 여론조사니 하는 ‘철갑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려는 태도가 문제라 했다. 죄다 과거지향적인 잣대가 아닌가. 어제 일어난 결과만 알려주니까.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있겠나. 눈을 바꾸는 거다. 철갑렌즈를 벗고 소프트렌즈로 바꿔 끼우란다. 계량화를 벗고 스토리를 입으라는 얘기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듣고, 물건을 만지고, 예술가를 만나라고 했다.
난다 긴다는 동료와 선후배를 싸잡아 비난하고 그간 세계경제를 돌린 패러다임의 전복을 시도한 이는 저자 피파 맘그렌.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백악관 경제정책 특별보좌관을 지낸 경제학자이자 정책전문가다. ‘신호’를 주제어 삼아 날선 시선을 곳곳에 박아낸 책은 두 갈래로 축을 세우고 근육 붙이기를 시도한다. 세계경제의 거대한 흐름을 뒤집는 신호조차 일상에서 소소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한 축, 그 일을 굳이 경제전문가에게만 맡길 필요가 없다는 게 다른 한 축이다.
△전문가의 헛발질에 정작 놓친 신호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한 그 ‘신호’ 한 번 보자. 마트에 갔다. 늘 보던 감자칩과 초콜릿이 보인다. 그런데 예전 같지 않다. 들어보니 가뿐하다. 가격은 그대로인데 중량이 줄어든 거다. 빵빵한 질소충전봉지에 감자칩은 3분의 1쯤 될까. 초콜릿은 대놓고 토막이 몇 개 빠졌다.
마트를 나선 저자가 영국으로 날아갔다. 난방비, 철도요금, 학교등록금, 집값이 동시다발적으로 오르던 그때는 브렉시트 찬반투표 얼마 전. 이 인상‘신호’가 영국시민이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란 걸 아무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더란다.
여성이 즐겨 쓰는 상품 중에 중요한 경제지표가 있다. 립스틱이다. 전쟁도 기아도 누르지 못한 립스틱을 향한 욕구가 있다는 건데. 스커트의 길고 짧음으로 불황과 활황을 재기도 한다지만 립스틱만은 고정값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경기악화에도 매출은 상승세였다니까. 저자는 여기서도 숨은 신호를 찾아냈다. 세계경제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을 구석이 있다는 ‘신호’.
수많은 신호 중 저자가 가장 공들여 설명한 건 패션지 ‘보그’ 영국판의 2009년 6월호 표지사진이다. 슈퍼모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가 전라로 등장한 한 컷 때문이다. 세계패션을 쥐락펴락하는 패션지에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모델이라니. 그것도 세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을 ‘왕년의 스타’를 다시 불러내서. 저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읽어냈다. 그동안 아무 거리낌 없이 카드를 긁어대던 젊은 고객층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신호’, 진짜 소득을 올리는 현실의 여성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신호’로 말이다. 게다가 이 모델을 보라. 비록 옷은 못 챙겼을지언정 립스틱은 바르고 있지 않은가.
△눈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보인다 경제위기
저자가 꼽은 신호의 공통점은 딱 한 가지다. 똘똘하고 잘난 수많은 경제전문가가 미처 보지 못한 징후다. 대어를 잡느라 잔챙이를 놓쳤다는 얘기도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다 놓쳤다!”
가령 어느 날부터 이웃집 개가 짖지 않더란다. 갑자기 웬 개타령인가 싶겠지만 배경은 이렇다. 이웃집은 마당 한쪽에 차고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일은 건축회사에 맡겼다. 그런데 얼마 전 아침부터 개가 조용하더란다. 건축 인부가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국 그 회사는 부도가 났고 인부는 계속 오지 않았으며 개가 짖을 일도 없어졌다. 금융위기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일을 두고 저자는 부동산과 주택담보대출, 건물과잉투자가 맞물린 금융위기를 분석한다.
|
500쪽을 넘긴 부피지만 저자가 책을 통해 내보내는 시그널은 간단하다. 수시로 일상서 뻗쳐 나오는 신호를 잡으란 얘기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더 나아질 테니. 그럼에도 살짝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진 않다. “예술가 등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대정신을 느끼고 작품에 반영한다”고 했으니. ‘보그’의 누드콘셉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옷은커녕 손수건 한 장도 등장시키지 않은 패션지가 변화를 감지하고 불확실성을 반영했다고 극찬을 쏟아냈는데. 잡지편집자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행위에서 시대적 징후까지 꿰뚫어내란 특명을 받들, 신의 주파수를 가진 보통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다.
그럼에도 행간은 읽힌다.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경제위기는 없다’는 소리다. 전문가에겐 질책이지만 보통사람에겐 자극인 일침. 신호를 잡는다는 건 저자가 그간 수없이 받아온 질문에도 답할 수 있는 거라니까. “주식을 살까요 팔까요” “금리가 언제쯤 오를까요” “집값은 오르나요 떨어지나요” “유가는요? 환율은요?” 그 답을 찾으려면 퇴근길에 시장 한번 들러보란다. 구석에 깜박깜박하는 뭔가가 보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