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팔고 버티는 것도 투자다[김학균의 투자레슨]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 등록 2024-12-12 오전 5:00:00

    수정 2024-12-12 오전 5:00:00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정치적 격변에 금융시장도 격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04년 3~5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 2016년 10월~2017넌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우리 사회가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나갈 터라 요즘과 같은 불확실성은 언젠가는 걷히겠지만 예기치 못한 정치적 격변을 소화할 수 있는 한국 경제의 내구성은 과거의 탄핵국면보다 많이 약해졌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경기 사이클이다. 2004년과 2016~2017년 탄핵 국면에서는 경기가 바닥을 치고 회복하고 있었지만 현 국면은 경기가 고점을 통과해 둔화하기 시작하는 국면에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돌출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한국경제는 카드버블 붕괴의 후폭풍에 시달리면서 민간소비 침체가 이어졌지만 중국 경제의 부상이 내수 부진을 상쇄했다. 2004년 대중국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41% 증가할 정도로 호황이었고 이런 수출 호조가 전반적인 경기 회복을 견인했다. 2004년 한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5.2%로 2003년의 3.2% 성장을 훨씬 뛰어넘었다. 2004년 봄의 탄핵 소동도 경제와 시장에는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불확실성을 낳았지만 수출 호조가 만들어 낸 든든한 펀더멘털로 한국 경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경기 사이클은 회복 국면이었다. 특히 2017년은 ‘빅 사이클’로 불렸던 반도체 산업의 초호황 국면이 이어지면서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줬다. 한국의 GDP 성장률은 2015년 2.8%, 2016년 3.0%, 2017년 3.2%로 높아졌다.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됐지만 보호무역의 파고도 당시 탄핵 국면에서는 높지 않았다. 대중국 관세를 인상하는 등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적 색채가 본격화한 시기는 2018년 하반기였다.

요즘 한국 경제의 체력은 과거의 두 차례 탄핵국면보다 훨씬 약해졌다. 시장 컨센서스 기준 올해 한국 GDP 성장률은 2.2%, 내년 전망치는 1.9%다. 완만한 둔화로 볼 수도 있지만 컨센서스가 계속 하향 조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연착륙 가능성에 큰 신뢰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2025년 GDP 성장률 컨센서스는 11월 초의 2.2%에서 한 달여 만에 0.3%p 낮아진 1.9%로 하향 조정됐다. 특히 현재 시장의 컨센서스에는 두 가지 리스크가 있다고 본다. 수출과 설비투자가 현재 시장의 컨센서스보다 많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지난달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전망 기관들 대부분은 관세 인상 등의 조치가 당장 2025년에는 단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2025년 한국 경제를 예측했다. 다음 달에 백악관에 입성할 트럼프가 어떤 정책을, 어느 시점에 내놓을지는 예측불허다. 다만 한국의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관세 대통령’이 취임하게 됐다는 사실은 매우 현실적인 위험요인이다. 최근 수년간 미국 경제는 호황이었고 중국 경제는 침체를 겪다 보니 한국의 대미 수출은 크게 늘어났고 대중 수출은 위축됐다. 2000년대 들어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국의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5% 내외,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내외에서 유지돼왔지만 올해는 11월까지 대중국 수출금액이 1212억 달러, 대미국 수출금액이 1159억 달러로 거의 비슷해졌다. 대중국 수출은 2017년 최고치의 78% 수준이고 대미 수출은 사상 최고치다.

설비투자 위축은 수출 둔화보다 성장률을 더 크게 끌어내릴 가능성이 높은 변수다. 2025년 설비투자가 올해보다 줄어들 가능성을 내년 성장률 추계에 반영한 예측 기관은 거의 없다. 올해 3분기까지 한국 GDP 계정의 투자는 전년 대비 2.6% 감소했다. 통상적인 상황일 경우 올해 투자가 감소했다면 내년에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저효과에 대한 기대인 셈인데 투자가 2년 연속 감소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2025년에는 설비투자가 감소하거나 적어도 시장의 컨센서스보다 훨씬 약한 회복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투자가 2년 연속 감소했던 사례는 모두 세 차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1998년,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이었던 2008~2009년 그리고 2018~2019년이 그랬다. 앞의 두 사례야 한국경제와 글로벌 경제가 모두 큰 위기 국면에 직면해 있었으니 예외적인 2년 연속 투자 감소가 나타날 수도 있었던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2018~2019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의 시기였는데 당시의 투자 감소는 미·중 무역분쟁에서 파생된 결과로 봐야 한다. 관세 전쟁이 벌어지면서 자유무역의 교리가 흔들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이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은 요즘이 2018~2019년보다 훨씬 더 크다. 트럼프 신정부가 출범하면서 보조금 지급을 통해 투자 유치를 도모했던 바이든 행정부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기존에 계획된 투자의 시행도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기업에 신규 투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비상사태도 어떤 식으로든 기업활동의 불확실성을 높여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설비투자는 시장의 컨센서스와 다르게 내년에 큰 폭으로 감소할 수도 있다.

내년 경제에 대한 기대치가 빠르게 하향 조정되고 있지만 추가적인 하방 리스크는 커 보인다. 다만 주식시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미 선조정을 받았다. 계엄령 선포 이후 코스피는 7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2018년 이후 올해 3분기까지의 7년 동안 코스피 상장사들이 벌어들인 영업이익 규모는 1500조원에 달한다. 최근 코스피의 시가총액은 2000조원을 밑돌고 있다. 주가지수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기업은 큰 규모의 이익을 쌓아왔으니 어떤 기준으로 봐도 한국증시는 저평가돼 있다. 저평가가 곧 시장의 바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주가 조정이 장기간 진행된 상황에서 뒤늦게 비관론에 경도돼서는 안 된다. 나쁜 가격에 주식을 팔지 않고 버티는 것도 중요한 투자 행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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