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시픽 림>에서 지구를 빼앗으려 온 카이주 (사진=<퍼시픽 림>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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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제작을 맡은 영화 ‘퍼시픽 림’ 시리즈에는 지구를 빼앗으려는 외계 종족 ‘프리커서’가 보낸 외계 괴물 ‘카이주’가 등장한다. 괴수(怪獸)의 일본 발음이다. 지구를 지키려는 거대 로봇 ‘예거’를 차례차례 쓰러뜨리며 카이주가 향한 곳은 일본이다.
정확히는 후지산 희토류를 찾아간 것. 카이주의 피가 희토류 광물과 반응해 대폭발을 일으켜, 후지산이 분화하면 지구상에 인류는 멸절한다는 설정이다.
| <퍼시픽 림>의 배경이 된 일본 후지산. 희토류가 많다는 설정인데 사실 매장량으로 보나 생산량으로 보나 희토류는 중국에 더 많다. 일본은 순위권에도 없다. (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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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막대한 희토류를 보유한 덕분에 카이주에 떨던 일본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중국은 지난 1일 수출관리법(중국명 수출관제법·出口管制法) 을 시행했다. 수출통제 조치를 지렛대 삼아 중국의 이익과 안보를 해치는 국가에 보복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평가다. 그간 신명나게 화웨이와 틱톡 등 중국 기업을 때려 온 미국을 겨냥한 조치다. 그런데 미국을 때리기 위해 시행한 수출관리법에 일본이 떨고 있는 건 왜일까?
지구를 정복하려는 프리커서처럼, 세계 패권국을 꿈꾸며 희토류를 무기화한 건 중국도 마찬가지라서다. 일찍이 중국은 희토류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1992년 덩샤오핑은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고 선언했다. 미사일과 레이더 등 첨단산업에 필요한 주요 부품에 필수 원료로 쓰이는 희토류를 대체할 재료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5월 희토류 생산업체인 장시성 간저우 진리 영구자석과학기술유한공사를 시찰하고 있다.(사진=신화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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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현재 전 세계 희토류 70% 이상을 공급하는 사실상 독점국이다. 2위 생산국인 호주(11.7%)와도 차이가 압도적이다. 희토류 생산이 엄청난 환경 오염을 동반한다는 이유로 서방 국가들이 희토류 생산을 줄인 때문이다. 희토류 1톤을 추출하려면 산성폐수 20만리터, 독성 가스 6300만리터가 발생한다. 미국이 2002년 세계 2위 희토류 광산 ‘마운틴 패스’를 폐쇄한 이유다.
중국은 10년 전 이미 희토류를 무기화한 바 있다. 상대는 일본이었다. 2010년 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마찰이 생기자 중국은 환경보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희토류 수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결국 전기차(EV)와 하이브리드 자동차 모터의 필수 소재 가격이 10배 넘게 뛰며 일본 수출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희토류 쇼크’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중국에 패널티를 적용하며 일단락됐다.
| 중국 장쑤성 롄윈강 항구에서 수출을 위한 ‘희토류’ 운반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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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일본을 겨눈 중국의 칼끝이 이번에는 미국을 향하고 있다. 수출관리법에 따라 미국에 희토류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아직 중국은 구체적 수출금지 대상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 군수업체 록히드마틴이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첨단무기를 만드는 데 중국한 희토류에 의존하는 만큼 향후 미·중 갈등 국면에서 희토류 수출 제한이 강력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미 한 차례 희토류 쇼크를 겪은 일본은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 호주에 투자해 중국을 거치지 않는 희토류 처리시설을 건설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주요국 가운데선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데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는 평가다. 실제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중국산 희토류 수입 비중은 91.3%에서 58%로 떨어졌다. 2025년까지 중국 의존도를 50% 미만으로 낮추는 게 목표다. 같은 기간 미국과 한국의 중국 의존도는 각각 80.5%, 90.9%다.
희토류 무기화에 시동 거는 중국에 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포착된다. 지난 10월 한국과 미국은 고위급 경제협의회(SED)를 열고 희토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모았다. 캐나다와 호주, 보츠와나도 미국과 손을 잡았다. 희토류 무기화에 대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