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처음 기자대상으로 조사한 트라우마 현황
한국기자협회(회장 김동훈)와 한국여성기자협회(회장 김경희)는 지난해 11월 구글 뉴스 이니셔티브와 미국 컬럼비아대 부설 저널리즘 및 트라우마 관련 비영리기관 ‘다트센터’ 아시아 태평양지부의 후원을 받아 11월 8일부터 18일까지 취재 트라우마 지원을 위한 설문조사를 했다.
남성 336명(61.8), 여성 208명(38.2%) 등 544명이 참여했다. 한국에서 기자를 상대로 실시한 취재 관련 트라우마에 관한 첫 번째 공식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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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근무 중 트라우마 느낀 적 있다” 78.7%
이번 조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는 동안 심리적 트라우마를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에 응답자 544명 중 428명(78.7%)이 있다고 답했다. ‘전혀 또는 거의 없음’ 116명(21.3%), ‘가끔 있음’ 280명(51.5%), ‘자주 있음’ 105명(19.3%), ‘매우 빈번함’ 43명(7.9%)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비슷했다. 남성 기자 336명 중 176명(52.4%)이 ‘가끔 있다’라고 답했다. ‘자주 있음’ 64명(19.0%), ‘매우 빈번함’ 20명(6.0%)이었다. 여성 기자 208명 중 104명(50.0%)이 ‘가끔 있다’라고 답했다. 41명(19.7%)이 ‘자주 있음’, 23명이 ‘매우 빈번함’(11.1%)이라고 답했다.
사회부 기자, 저연차 기자가 트라우마 많이 겪어
트라우마를 겪을 당시 담당 부서는 사건팀, 법조, 정부 부처를 포함한 사회부가 206명(48.1%)으로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지방자치단체(지역) 44명(10.3%), 경제 산업 금융 등 경제부(9.3%) 청와대 정당 외교·안보 등 정치부 26명(6.1%), 탐사보도 기획취재 25명(5.8%) 순이었다.
근무 연차별로 보면 저연차 기자일수록 트라우마를 느끼는 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3년차 기자 74명 중 자주 있음 13명(17.6%), 매우 빈번함 12명(16.2%)으로 나타났다. 4~5년차 기자 61명 중에는 자주 있음 14명(23.0%), 매우 빈번함 8명(13.1%)로 집계됐다.
개별 항목에서 10년차 기자들이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응답이 높게 나왔다. 이는 언론사마다 시경캡이나 탐사보도팀장 등 현장 팀장을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세월호 사건 또는 아동학대·성폭력 등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다룰 때 심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지속했느냐는 질문에 하루(1일 이내) 39명, 1일~30일 이내 201명(46.9%), 한 달 이상 188명(43.9%)으로 조사됐다.
트라우마 지속기간이 한 달을 넘을 때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받는 점을 고려하면 의학적으로도 경고등이 켜진 이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트라우마 경험을 호소한 428명에게 어떤 상황에서 트라우마를 느꼈는지 복수로 답변을 받았다. ‘취재 과정’이라고 응답한 이가 261명(61.0%)으로 가장 높았다. 이어 250명(58.4%)이 ‘보도 이후 독자들의 반응’을 꼽았다. 이메일이나 댓글, 전화 등을 통한 온·오프라인상의 항의와 공격 등을 포함한 것이다.
기사 작성 및 보도 과정에서 ‘내근 데스크나 조직 내부에서 겪는 갈등’ 205명(47.9%), ‘취재나 보도 전후 취재원과의 관계’ 187명(43.7%), ‘기사 작성 및 보도 과정’ 156명(36.4%), ‘보도 이후 소송 등 법률문제’ 152명(35.5%) 순이었다.
희생자 가족 취재 트라우마 커
기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접하는 구체적인 15개 항목에 대해 심리적 트라우마를 느낀 적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자연재난, 대형화재 또는 폭발·침몰 사고, 교통사고, 집회 현장, 성폭력, 폭력 사건, 자살사건, 아동학대, 코로나 등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질병, 희생자 또는 가족 관련 단체 취재, 정치인 및 정당과 지지자 그룹, 연예인 등 유명인과 팬클럽, 전투나 전쟁터·테러,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대해 질문했다.
전혀 없음(0)부터 시작해 거의 없음(1) 가끔 있음(2) 자주 있음(3) 매우 많이 있음(4)을 기준으로 자신이 해당하는 정도를 고르도록 했다.
항목별 트라우마 정도를 0~4점(전혀 없음~매우 많이 있음)으로 점수를 매긴 뒤 평균값을 낸 결과, 희생자 가족 및 관련 단체 취재가 2.80으로 가장 높게 나왔다. 아동학대(2.63), 자살사건(2.52), 대형화재 및 폭발·침몰 사고(2.43), 성범죄(2.38)가 그 뒤를 이었다. 코로나 등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질병(2.25), 온라인 커뮤니티(2.22), 전투나 테러(2.20), 교통사고(2.13), 폭력 사건(2.04)도 모두 평균값이 2를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통상 ‘3(자주 있음)’ 이상 돼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문가들은 ‘2(가끔 있음)’ 단계부터 이상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설문조사 및 분석 과정에 자문위원으로 함께한 안현의 이화여대 교수는 “일반인들은 평생 한두 번 큰 사건을 통해 트라우마를 겪는 경우가 많다”라며 “트라우마 평균값이 2를 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기자들이 업무상 트라우마에 지속해서 노출되고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주변에 상담, 술·수면제 의존으로 해결 도모
428명에게 중복 선택이 가능하도록 물은 결과 휴가 등 현장과의 거리두기가 182명(42.5%)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직장 동료, 타사 동료 등 주변인들과의 상담 162명(37.9%)으로 조사됐다. 그 다음으로 ‘술 또는 수면제 등 약물에 의존한다’는 답변을 117명(27.3%)이 택했다. 병원 및 상담소 등 전문 상담 치료를 받았다는 사람은 37명(8.6%)으로 나타났다. 조직 내 관련 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람은 12명(2.8%)에 그쳤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이들이 88명(20.6%)이나 됐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묻자 상당수가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등의 답을 내놨다. 일부는 “당시 모든 기자가 겪는 문제라서” “원래 그런 직업이라 생각해서” “감당해야 되는 줄 알았다”라며 기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트라우마 관련 교육 못 받았다 81.8%
기자들은 업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취재나 보도를 하기 전 ‘회사로부터 적절한 교육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28명 중 350명(81.8%)이 그렇지 않음이라고 응답했다.
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544명 중 166명(30.5%)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거의 없음도 162명(29.8%)으로 조사됐다.
안 교수는 “PTSD 증상의 의미나 이론 같은 것이 아니라 기자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외부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트라우마를 느끼고 난 뒤 지원책도 중요하지만 예방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언론사나 관련 언론단체가 적극적인 예방교육 프로그램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 등 공론화 및 대책 마련 나서기로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 등은 이번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취재 중 트라우마 사례 및 대응 방안을 정리해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방침이다.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회장은 “사건 사고의 일선에서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는 환경에 너무도 쉽게 노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보도 이후 댓글 등에 기자와 언론의 인격을 모독하는 글로 2차 피해를 겪으며 기자들이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방법 또한 다양화되고 강도도 심각해지고 있다”며 “이번 기자 트라우마 실태조사를 통해 시급히 개선해야 할 취재 환경부터 하나씩 바꿔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경희 한국여성기자협회장은 “공감은 취재와 기사 작성의 시작점이지만, 기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며 “현장 기자들이 사회 구성원, 특히 약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스스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언론계가 함께 트라우마 예방과 치유 매뉴얼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