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발생한 아시아 외환위기가 선진국 자본을 등에 업은 헤지펀드의 공격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면, 이번 위기는 미국 월가에서 비롯돼 아시아와 동유럽으로 확산됐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선진 시장 때문에 이머징 국가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이 커질 수 있다.
11년 전 직·간접적으로 위기를 경험을 한 이머징 국가들은 이번 금융위기에 맞서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아이슬란드가 주변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아시아에서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공동기금 설립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위기 극복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아시아 공동기금 설립 합의
1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이 대규모의 기금 설립에 합의했다. 월가 위기로 타격받은 아시아 금융사들을 지원하고 부실자산 등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다. 11년 전 혹독한 위기를 경험한 국가들이 대부분인만큼 이번에는 조기에 위기 대응에 나서겠다는 의도다.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이 기금은 은행들의 부실 자산을 매입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금융사들을 지원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어 세계은행(WB)이 초기에 100억달러를 기금에 투입하게 될 것이며, ASEAN 회원국들과 한국, 중국, 일본, 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자금을 투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금 설립 계획은 지난주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은행과 IMF의 긴급회의에서 제기됐으며, 세부 계획은 여전히 조율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IMF가 아시아 지역의 공동기금 설립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지는 미지수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에도 일본 주도로 아시아통화기금(AMF) 설립이 논의된 바 있지만, 당시 미국과 IMF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시아의 외환위기는 각국 통화가치 급락으로 인한 외환보유고 급감이 원인이 됐다. 지금은 어떤가. 일부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감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전체로 보면 외환보유고는 충분한 상태다. 따라서 지역 차원의 기금을 조성한다면 서방 국가의 도움 없이도 어려움에 빠진 국가들을 지원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6일 다우존스뉴스와이어에 따르면 지난 9월말 현재 아시아 12개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는 4조3510억달러로 집계됐다. 비달러화 자산 가치 하락으로 전월에 비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막대한 수준이다.
특히 중국의 9월 외환보유고는 전월 대비 1.2% 증가한 1조9100억달러를 기록했다. 보유 외환이 가장 많이 증가한 국가는 태국(2.2%)이었고, 중국, 홍콩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파키스탄은 글로벌 신용위기로 인해 대외 유동성이 크게 악화되고 있는 데다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30억달러 규모의 부채상환 능력도 의심받고 있다. 파키스탄의 현재 외환보유액은 1년 전보다 절반가량 줄어든 81억 4000만달러다.
말레이시아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 나라의 외환보유고는 지난달 10.5% 줄어 위기 우려가 높아졌다.
◇ 동유럽·남미 국가들도 위기
위기는 유럽의 이머징 국가들에 먼저 닥쳤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가장 먼저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곳은 아이슬란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은행들의 주가가 폭락하고, 예금인출이 쇄도하면서 은행업 위주의 경제 구조가 붕괴됐다. 아이슬란드는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IMF는 물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최초로 러시아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동유럽에서는 헝가리와 우크라이나가 IMF에 손을 벌렸고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이 줄줄이 시장 대란으로 공황상태다.
14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국가의 부도 위험을 반영하는 국가 신용디폴트스왑(CDS) 거래에서 이머징 국가의 부도 위험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CDS 시장에서는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아이슬란드 등의 부도 위험이 80% 이상인 것으로 반영되고 있다. 은행의 차입거래 비중이 높은 카자흐스탄과 라트비아 경제 건전성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럽 국가 중 경상적자 수준이 가장 높은 터키도 낙관하긴 어려운 처지다.
◇ 공짜 점심은 없다
국가부도 위험에 내몰린 나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다행히 국제 사회의 도움이 이뤄질 경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돈을 지원하는 국가들도 나름대로의 계산은 있다.
아이슬란드가 나토 회원국으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한 것과 관련, 러시아가 이번 기회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나토 회원국을 원조함으로서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경우도 단순한 자금 지원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아라비아해에 접한 그와다항 개발과 관련해 파키스탄의 협력이 절실하다. 이 항만을 개발할 경우 중국 해군이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11년 전인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한국은 IMF의 강력한 경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정리됐고 실직자가 쏟아졌다.
태국은 2003년 120억달러의 채무를 상환하면서 IMF 체제를 조기 탈피했다. 얼마 후 탁신 총리는 "다시는 국제 자본으로부터 상처받는 사냥감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는 IMF의 원조를 구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국제 사회의 원조가 `공짜`는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