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신사 꿈꾸는 왕서방…시대 트렌드 이끈 '삽화'[정하윤의 아트차이나]<16>

▲중국잡지 '양우'에 담긴 1930년대 이상향
20세기초 서구열강이 집어삼킨 中
서구=좋은 것…라이프스타일 동경
중절모·트렌치코트 육아하는 '아빠'
청소기·시리얼 서양살림하는 '엄마'
전통 아빠·엄마 이미지 균열 생겨
삽화, 현실 아닌 편집자 믿는 이상
  • 등록 2023-01-27 오전 12:01:00

    수정 2023-01-27 오후 1:32:34

삽화 ‘과거와 현재’(1932). 서구 문물·문화가 밀려들던 1930년대 중국 상하이 배경으로 전통적인 가족과 서구화한 가족을 대비해 묘사하고 있다. 앞쪽에 두고 좀더 크고 세심하게 묘사한 그림이 이미 분위기를 가져갔다. 모던한 서구식 복장을 한 아빠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이상적’이란 거다. ‘양우’ no.75.


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아빠 육아 예능이 TV 프로그램에서 대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부터 ‘아빠! 어디가?’ 최근 ‘물 건너온 아빠들’ 등등. 출연하는 아빠들은 엄마 없이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여행도 잘한다. 뿐만 아니다. TV 속에는 요리 잘하는 남자들도 참 많다. 전문 요리사가 아님에도 앞치마를 두르고 능숙하게 전복을 손질하거나 생선회를 뜨고, 메뉴를 개발해 편의점에 출시도 한다. 현실은 어떨지 몰라도 요즘 TV 프로그램만 보면 육아하는 아빠, 살림에 능한 남자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시대와 지역을 살짝 바꿔 20세기 초 중국으로 가보자. 듣자 하니 중국 남자들은 요리가 수준급이라 하던데, 정말일까. 가장 대중적이었다고 할 당시 잡지 이미지를 참고해 보겠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33년 상하이에서 출간된 ‘양우’(良友·1926. 2~1945. 10)란 종합잡지에 실린 삽화다(한국으로 치면 ‘별건곤’이나 ‘삼천리’에 비할 수 있겠다).

집안에 한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집안 꼴은 난리다. 정리가 안 된 너저분한 침대에는 빨래가 대롱대롱 걸린 빨랫줄이 연결돼 있다. 식탁에 앉은 아이는 울고 있다. 배가 고픈 모양이다. 남자는 한손에는 냄비를, 한손에는 양동이를 들고 요리를 해야 하나 청소를 해야 하나 허둥대는 중이다. 입으로는 아이를 달래면서. 엄마는 어디로 갔나. 삽화 제목이 ‘와이프가 친정에 갔을 때’라며 그 답을 친절히 알려 준다. 그래도 아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벽에 걸린 사진 속에 존재한다. 이 모든 상황을 예견했다는 듯 씩 웃고 있는 모습으로. 이런. ‘대륙’ 남자들이 가사와 육아에 능하다는 소문은 정녕 거짓이었나.

삽화 ‘아내가 친정에 갔을 때’(1933). 빨래가 제멋대로 널린 너저분한 집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남자가 보인다. 아이는 울고 있는데, 한손에 냄비, 다른 한손에 양동이를 든 채 갈팡질팡하는 남자. 마치 밀려드는 서구 문화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1930년대 상하이에 사는 중국 남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양우’ no.80, p.35.


옛 중국 관습은 낡고 후진, 결국 버려야 할 것으로 그려

글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 1년 전 같은 잡지에 실린 또 다른 삽화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전면에 서 있는 가족이다. 아이를 안고 걷는 훤칠한 아빠는 흡사 영국신사처럼 중절모를 쓰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그 옆에 모피코트를 입은 아이 엄마는 남편의 팔짱을 끼고 발맞춰 걷고 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핵가족이다. 그들의 왼편으로는 정확히 반대되는 모습의 가족이 보인다. 복장은 청나라 시대 스타일. 여자는 아이를 안고 있고, 남자는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표정은? 그리 좋지 않다. 부유해 보이지도, 딱히 화목해 보이지도 않는다.

삽화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모던한 서구식 복장을 하고 아빠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이상적’이라는 것. 둘 중 누가 1930년대 상하이의 현실인지는 모르겠다손 쳐도, 분명한 사실은 ‘이상적인 아빠’가 전통적인 가부장적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다. 적어도 ‘양우’를 만든 사람들, ‘양우’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렇다면 ‘워너비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같은 잡지의 광고 이미지를 참고해 보자. 화면은 둘로 나뉘어 있다. 왼쪽에는 빗자루, 오른쪽에는 청소기로 청소를 하는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비질에는 먼지가 엄청나게 나고, 청소기를 돌리니 아주 깔끔하다(그림이라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먼지가 풀풀 날려 하나 마나인 비질과 깨끗하고 세련된 청소기. 무엇을 택하는 것이 더 ‘똑똑한’ 주부인지는 자명하다.

광고 ‘상하이 전기회사’(1932). 청소기 광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기 광고다. 매일 여섯 시간 사용했을 때 고작 4분(1원元=10각角=100분分)의 비용이 든다는 문구가 보인다. 잡지에는 가전제품을 이용해 살림하는 아내가 세련됐다는 것을 강조하는 청소기·다리미 광고 시리즈가 있었다. ‘양우’ no.71, p.13.


식품 광고 역시 비슷하다. 요즘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켈로그 시리얼 광고 속 엄마는 집안에서 상을 차려놓고 가족을 기다리고, 아빠와 아이는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엄마의 식탁은? 시리얼이다(그림 속 아빠는 그 상차림에 매우 만족한 표정이다). 서양식 간편한 식사준비가 세련된 현대식 주부란 점을 어필한 거다. 굳이 외국인 모델까지 그려 가면서 말이다.

이 모든 이미지는 한곳을 가리킨다. 남자라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 여자라면 서양식 가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선망할 만하다는 것이다. 선망의 대상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누군가 혼자 머릿속에서 그려냈을 리 없다. 시대의 산물이다.

20세기 초 중국에는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이 있었다. 일찍이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은 중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상하이는 심지어 ‘쪼개진 수박’이라고 불렸다. 이쪽은 프랑스령, 저쪽은 영국령 등 힘센 서구 나라들이 나눠 먹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모든 것은 힘 있고, 세련되고, 멋지고, 응당 따라야 할 이상향처럼 느껴졌다. 물론 반대 입장도 있었지만 ‘서구=좋은 것’이란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옛 중국의 많은 관습은 낡은, 후진, 결국 버려야 할 것으로 비쳐졌다. 근엄하고 권위 있는 아버지보다는 육아·가사에 적극 참여하는 아빠,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편리한 서양식 살림을 신속히 도입하는 엄마가 선망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게다가 ‘양우’의 편집자들은 서구화를 지향하는 엘리트 지식층이었으며, ‘양우’는 코스모폴리탄이라 할 수 있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발행됐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이미지들은 그 태생 자체가 서구지향적이었던 거다.

광고 ‘켈로그 시리얼’(1934). 아빠와 아이가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집안에서 엄마는 음식을 차려놓고 이들을 반기고 있다. 식탁에 차려진 것은 시리얼. 서양식 간편한 식사준비가 세련된 현대식 주부란 점을 어필하고 있다. ‘양우’ no.87.


현실과 이상 사이엔 늘 괴리가 있는 법

그렇다면 과연 현실은 어땠을까. 혼자 아이와 남겨진 채 우왕좌왕하는 아빠, 능숙하게 아이를 돌보는 아빠, 둘 중 누가 진짜였을까. 정말 100년 전 중국에서 전기 청소기를 돌리며 시리얼로 식사준비하는 엄마가 있었을까. 글쎄, 있더라도 극히 일부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상하이가 국제항구도시가 됐고, 현대식 옷을 입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해도 가정 전체가 서구식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다.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니까.

게다가 미디어는 언제나 현실과는 좀 다른, 이상적인 모습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법이다. 한국만 해도 TV 속 육아 예능과 현실의 곤두박질치는 출산율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지 않나. 그러니 ‘양우’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현실 자체라기보다 편집자들이 믿는 유토피아 버전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우리가 ‘양우’에 게재된 이미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유의미한 사실은 사회가 격변하던 20세기 초 중국에서 ‘아빠’ 또는 ‘남편’, ‘엄마’ 또는 ‘아내’의 이미지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여기에 21세기 한국의 미디어가 바람직하다고 보여주는 모습도 20세기 상하이의 잡지가 선망했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광고나 미디어, SNS 속 이미지는 현실 그대로가 아닌 이상에 가깝다. 20세기 초 중국 잡지에서 발견한 이미지는 따라서 그 시대의 ‘현실’이 아닌 ‘이상향’으로 읽어야 한다. 21세기에도 마찬가지다. TV 화면 속 여러 이미지를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저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걸 멋지다고 여기는군’ 하며 하나의 경향으로만 보는 게 여러모로 좋을 듯하다. 아무튼 우리는 ‘현생’을 살아내야 하니까.

※‘양우’(良友)

중국에서 20년 남짓 간행한 종합화보잡지다. 1926년 2월 상하이에서 창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인 1945년 10월 폐간했다. 당시 서구와 교류가 활발했던 국제도시 상하이를 배경으로 중국이 겪은 근대적 변화과정, 서양이 들여온 근대문물을 사진·원색그림·흑백삽화 등으로 보여줬다. 여성 모델이 돋보이도록 섬세한 사진기법으로 꾸민 컬러 표지가 인기를 끌었고, 내지에도 질 좋은 화보를 제공해 당시 중국에서 간행한 인쇄물 중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화보란 평을 들었다. 중국 신문·잡지 출판역사상 발행기간이 가장 길고, 전파범위가 가장 넓으며,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잡지로 꼽힌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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