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때가 있단 말 믿었다"…조각한지로 '파란' 일으킨 MZ작가

△갤러리조은 3인전 '파란'에 나선 작가 성연화
"현대적 동양화는 밀도감 떨어진다" 평가에
물풀입힌 수제한지, 아크릴물감·파라핀까지
바다·산 닮은 잔잔한 자연색에 컬렉터 호응
중견작가 채성필·장광범 틈서 '내공' 돋보여
  • 등록 2023-03-30 오후 3:30:11

    수정 2023-03-30 오후 3:30:11

작가 성연화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에서 채성필·장광범과 열고 있는 ‘파란’ 전에 건 자신의 작품 ‘흐름’(Flow) no.56’(2023·왼쪽)과 ‘흐름(Flow) no.61’(2023) 앞에 섰다. 100호(162.2×130.3㎝) 규모의 작품은 극강의 밀도감으로 단련한 한지를 캔버스에 한 줄씩 올려붙여 시간의 흐름, 세상의 흐름을 흘려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바다와 산, 물결과 숲이라고 해두자. 그렇다고 거센 바다, 강한 산세인 것도 아니다. 한 단계씩 깊이를 더해가는 색의 스펙트럼이 자연스럽게 캔버스를 적셔간다고 할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앞에 서면 내가 선 위치를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어디쯤에 있나. 허연 위쪽인가, 연한 중간인가, 진한 바닥인가.

그런데 말이다. ‘내가 선 좌표’를 묻는 일, 현대인이 살면서 가장 난감해하는 그 일조차 마다하지 않게 한 저 색채의 농담이 말이다. 물감과 붓만으로 만든 게 아니란 거다. 한 줄 한 줄, 한 층 한 층, 아니면 한 조각 한 조각. 바로 캔버스에 붙인 한지가 내고 있는 ‘변화’란 거다. 길죽하게 또는 각이 딱 잡힌 사각형으로 잘라낸 수제한지에, 물풀을 녹여 바르고, 돌을 문질러 질감을 만들고, 커피가루 녹여낸 안료로 톤을 잡고, 아크릴물감을 두세 번 칠해 색을 얹고, 파라핀으로 덮는 마무리까지. 그렇게 제법 두툼하게 만든 한지들이라니 말이다. 아, 하나가 더 있다. 조각한지의 사방을 향으로 태워 은은한 불자국을 낸다니, 그제야 캔버스에 붙을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하니.

갤러리조은 ‘파란’ 전 전경. 작가 성연화가 크게 두 갈래로 내고 있는 ‘흐름’(Flow)과 ‘평온’(Serenity) 연작 중 일부다. 왼쪽부터 ‘흐름 no.58’(2023·80.3×116.8㎝), ‘평온 no.60’(2023·60.6×60.6㎝), ‘흐름 no.60’(2023·65.1×50㎝)(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현대적인 동양화는 실물을 본 이들이 실망했단 얘기를 자주 한다. 내용이 아니라 밀도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이 작업을 시작할 때 가장 고민했던 게 그 밀도감이었다.”

가공하지 않은 거친 한지를 구하는 것도, 아크릴물감을 택한 것도, 파라핀으로 ‘코팅’작업을 하는 것도, 그렇게 극강의 밀도감을 지닌 밑작업으로 시작도 전에 진부터 다 빼는 노동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 것이 말이다. 모두 ‘현대적’이란 수식이 주는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란 얘기다.

오히려 더 자유로워야 할 그 ‘현대’란 게 왜 이토록 무거운 부담이 됐을까. 그래도 명색이, 하늘 아래 무서운 게 별로 없다는 MZ세대 작가가 아닌가. 그랬다. 단단하다 못해 진중하기까지 한 이 ‘내공 있는 작품’에는 뭔가 있겠다 싶었다.

갤러리조은 ‘파란’ 전 전경. 작가 성연화의 작품이 나란히 걸렸다. 거친 질감이 들여다보이는 사각한지를 조각퍼즐 맞추듯 캔버스에 붙여낸 ‘평온’(Serenity) 연작 중 두 점이다. 선의 흔적으로만 남긴 글씨의 획이 보인다. ‘평온 no.61’(2023·72.7×60.6㎝·왼쪽), ‘평온 no.56’(2023·91×91㎝)(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은’ 한지로 맞춰낸 ‘큰’ 그림

작가 성연화(37)를 만난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 ‘파란’ 전을 열고 있는 곳이다. 성 작가만의 개인전은 아니다.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중견작가 채성필(51), 장광범(51)과 여는 3인전이다. 사실 말이 3인전이지 정확히 3분의 1의 지분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다. 작가의 연륜으로나 작품의 규모로나 성 작가는 다른 두 작가에 한참 밀리니까. 그럼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있다. 흙과 물의 흔적으로 자연의 형상을 빚어내는 채 작가, 퇴적된 지층의 흔적을 그보다 적나라하게 물감으로 쌓아내는 장 작가의 강렬한 작품들이 걸린 그 사이에 어깨를, 아니 캔버스를 맞대고 있으니까.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는 두 작가의 ‘어쩔 수 없는’ 빈자리까지 거뜬히 대신하고 있다고 할까.

작가 채성필·장광범·성연화가 3인전으로 열고 있는 갤러리조은의 ‘파란’ 전경. 채성필의 ‘땅과 달(Terre et Lune) J220815’(2022·왼쪽)이 성연화의 ‘흐름’(Flow) no.56’(2023·162.2×130.3㎝), ‘흐름(Flow) no.61’(2023·162.2×130.3㎝)과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성 작가의 작품은 크게 두 갈래다. 한지에 묻혀낸 색의 짙고 옅음으로 시간의 흐름, 세상의 흐름을 캔버스에 붙여낸 ‘흐름’(Flow) 연작이 하나. 질감이 들여다보이는 사각한지를 조각퍼즐 맞추듯 캔버스에 붙여낸 ‘평온’(Serenity) 연작이 또 하나. 전시에는 100호 규모의 ‘흐름 no.56’(2023)과 ‘흐름 no.61’(2023)을 앞세워, 올해 작업한 크고 작은 두 연작 10여점을 걸었다.

서른 살 후반. 이미 ‘신진’의 딱지를 떼고도 남았겠다 싶지만, 성 작가가 첫 개인전을 연 것은 4년 전인 2019년이다. 대구갤러리에서 연 ‘시우’ 전. “시우지화(時雨之化)란 맹자(‘진심잔구상’ 편)에서 따온 말로 전시명을 삼았다. ‘때맞춰 내리는 비가 만물을 살린다’는 뜻인데 이를 내 식대로 해석했다. 뭐든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의미로 말이다.”

작가 성연화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에서 채성필·장광범과 열고 있는 ‘파란’ 전에 건 자신의 작품들 앞에 섰다. 왼쪽부터 ‘흐름(Flow) no.58’(2023·80.3×116.8㎝), ‘평온(Serenity) no.60’(2023·60.6×60.6㎝), ‘흐름(Flow) no.60’(2023·65.1×50㎝)(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뒤늦은 개인전만으로도 짐작이 되지 않는가. 죽어라 한 우물을 팠던가, 죽어라 팠던 한 우물을 덮었던가. 어느 쪽이든 고단하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런데 세상에 그림을 판다기보다 신고하는 일쯤으로 여겼던 첫 개인전이 말이다. 작가에겐 “감 잡았다!”가 됐단다. 덕분에 서울 갤러리들에서 여는 공모전에 집중적으로 참가할 힘을 얻었고. 그러던 중 삼청동 갤러리일호에서 답이 왔다. 상으로 얻은 두 번째 개인전이자, 첫 서울 개인전을 그곳에서 열었다.

그다음엔 “미친 듯이”가 수순이었다. 봇물 터지듯 작품을 꺼내놓기 시작한 거다. 2021년 3회, 2022년에는 4회나 개인전을 했다. 그중엔 미국 LA 웨스턴갤러리에서 연 ‘현실주의와 초현실주의’ 전(2021)도 포함돼 있다. 이뿐인가. 독일·스페인·미국 등으로 작품을 날려보낸 단체전이 8회, 또 그 중간에는 아트페어에도 8회쯤 참여했더랬다. 이 중 절반이 해외 아트페어다. “이 모두가 채 4년도 못 된 시간 동안 이뤄졌다.”

성연화의 ‘흐름’(Flow) no.56’(2023·162.2×130.3㎝·위)과 ‘흐름 no.58’(2023·80.3×116.8㎝)의 일부를 확대해 들여다봤다. 물풀부터 커피안료, 아크릴물감, 파라핀까지 입힌 수제한지 조각에 한 단계씩 변화를 준 색의 층위, 하나하나 향으로 태워 마무리한 작업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내공의 토대는 ‘서예’…단단한 배경으로

성 작가는 서예를 전공했다. 드물게 힘 있는 필체라고 칭찬이 자자했단다. 그런데 그걸 마다하고 ‘현대서예’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오랜 세월 글씨에 몰입해오신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보탤 만했다. 눈을 찔끔 감고 고안에 고안을 거듭했다. 캔버스에 연하게 글씨의 형체를 넣거나, 한지를 조각내 붙이는 ‘독창적인’ 회화작업이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림만 그려온 선배작가들의 눈이 곱지 않았던 거다. ‘근본 없는 자격 미달’쯤으로 취급받았다고 할까.

어정쩡한 위치였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단 뜻이다. 한쪽에선 ‘정신 못 차리고 곁눈질 한다’고 야단이었을 거고, 다른 쪽에선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이냐’고 야단이었을 거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는 융합·조화, 이런 건 ‘일가를 이룬’ 대가들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막 작가의 길에 들어선 새내기에겐 ‘제 길도 모르는’ 천방지축으로 보이기 딱이었을 거다.

작가 성연화가 갤러리조은에서 채성필·장광범과 열고 있는 ‘파란’ 전에 건 자신의 작품 ‘흐름’(Flow) no.56’(2023·왼쪽)과 ‘흐름(Flow) no.61’(2023) 앞에 섰다. 100호(162.2×130.3㎝) 규모의 작품은 극강의 밀도감으로 단련한 한지를 캔버스에 한 줄씩 올려붙여 시간의 흐름, 세상의 흐름을 흘려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보다 앞선 전적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200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때마침 금융위기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 졸업도 못한 채 돌아왔다”고 했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1인기업을 차렸단다. 당시 불어온 ‘캘리그라피’ 바람을 타고 글씨 디자인과 서예를 가르치는 학원을 차린 거다. “10여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 첫 개인전은 그렇게 준비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성 작가가 추구하는 건 “따뜻하고 편안한”이란다. “작품을 하면서도 가장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 멈춘다”고 했다. “우리는 시대의 흐름과 템포대로 살 수 없다는, 그걸 말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아트페어를 휩쓸고 개인전 완판도 경험했지만 성 작가는 “내 작품이 팔려나가는 게 여전히 신기하다”고 했다. 작가가 그러거나 말 거나 화단에선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기는 중이다. 잔잔한 자연색에 은은한 향까지 지닌 작품들이 컬렉터에게 제대로 ‘먹히고’ 있으니까. 파란빛의 정수를 모은 ‘파란’ 전에서 조용하게 일으키고 있는 파란은 그 ‘흐름‘의 과정일 뿐. 전시는 4월 8일까지.

작가 채성필·장광범·성연화가 3인전으로 열고 있는 갤러리조은의 ‘파란’ 전경. 한 관람객이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다. 왼쪽 벽면에 걸린 성연화의 작품 ‘흐름’(Flow)·‘평온’(Serenity) 연작과 이웃한 채성필의 작품들이 보인다. ‘대지의 몽상 211220’(2021·162×130㎝·왼쪽)과 ‘물의 초상 220709’(2022·162×130㎝)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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