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사례2. 권 모씨는 최근 이사를 결심했다. 집 주인이 전세보증금을 5000만원이나 올려달라고 해서다. 지난 번 재계약 때도 2000만원을 올려달라고 해서 어렵게 대출을 받았는데 이번엔 대출받을 여력조차 없는 상황이다. 권 씨는 “서울은 힘들 것 같고, 좀 불편하더라도 서울 인근으로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밝혔다. 가계가 빚 부담에 허덕이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만 해도 기업 부채가 경제위기의 원흉이 됐으나 이제는 그 부채가 가계로 옮겨붙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은 2009년 이후 산업별 대출금 합계 증가율보다 더 높게 증가했다. 2010년엔 산업별 대출금 합계 증가율이 1.4% 증가할 때 가계대출은 8%나 늘어났다.(지난해는 산업별 대출금 증가율이 더 높게 증가함)
| <자료: 한국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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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기업이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 주체가 사라지자 가계대출을 통한 내수활성화 정책이 나왔다. 결국엔 2003~2004년 카드대란이 닥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주택 가격 상승은 가계대출을 급격히 늘리기 시작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이 경제성장을 이끌 수 없는 상황에서 신용완화를 통한 내수활성화가 가계부채를 늘렸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맞물려 가계부채가 가파르게 증가한 측면이 크다”고 밝혔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2013년까지 매년 가계부채 증가분(가계신용 증가분의 절반이 총수요로 이어진다고 가정)이 해당 연도의 경제성장률을 평균 2.9% 증가시켰다. 지난해 가계부채가 없었다면 경제성장률은 0.3%로 축소된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은 “가계 빚으로 수요가 창출되면서 경제성장을 떠받힌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 <자료: 가계금융 및 복지조사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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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택 가격이 하락하고 전세금이 치솟는 등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자 가계 빚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을 물론, 생계형 대출까지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가계금융 및 복지조사에서 용도별 대출을 보면 사업자금, 생활비 대출 비중은 각각 28.3%, 6.5%로 전년대비 0.7%포인트씩 늘어났다. 거주주택 마련 대출 비중은 부동산 경기악화로 34.7%를 기록, 0.5%포인트 줄었다. 가계대출 중 비은행금융권의 비중이 50%를 돌파할 정도로 빚의 질도 악화됐다. 최근 가게 임대료를 내지 못해 액세서리 장사를 접은 백 모씨는 “곧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남은 건 빚 뿐이었다”고 말했다.